소설 행인 속 형수

위로 2016. 1. 2. 00:09

머리가 나빠서 책을 한번만 읽어서는 명확하게 기억을 못한다. 인상 깊은 몇몇 구절만 드문드문 기억날 뿐.

나츠메 소세키의 행인 은 엄청 좋아하는 책이지만,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난 형의 부인, 그러니까 소설 속 화자의 형수가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
특히 형수와 와카야마로 가는 기차 안에서의 대화와 분위기 묘사가 생생하다.
전에 이 책을 읽고 쓴 포스팅에도 썼지만,
주인공인 형은 등장하지도 않는 그 장면에서는 형수의 성격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음에도 독자는 형수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그토록 그 장면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너무 대단해서 경외감마저 드는 소설들은 품위없이 직접적으로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잘된 예술작품은 표현의 차원이 다르다.

소설이든 영화든 우리가 전혀 듣도보도 못한 인물과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다. 어떻게 표현하고 서술하느냐가 그 작품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이다.

오늘 본 시카리오의 촬영이라든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같은 작품들은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작이 되는 것이고, 이런 작품과 다르게 자극적이고 직접적이면 범작이 되고.

다커서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읽을 때 마다 목이 매도록 슬픈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겨울이 되면, 크리스마스 연말 시즌이 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가끔 생각난다. 시기가 딱 그러니까. 


  난 요즘 유행하는 예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건 내가 시대 분위기에 편승한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약에 응답하라 2002 같은 드라마가 나온다면, 그 때 당시 월드컵에 미쳐 있었던 한국 사회와 환희 같은 걸 주로 다룰 것이라 생각한다. 모여서 응원하고 그런 거. 하지만, 나는 2002년에 단한번도 거리 응원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안한 건 아니다. 반발감이 특별히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노력해도 흥분이 되지 않았다. 딱 20살이었는데도 말이다. 경기 있다고 빨간 옷을 입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이 골을 넣었을 때도 (물론 나도 기뻤지만) 내 주변 사람들 처럼 방방 뛰고 껴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라도 소리 지르고 막 기쁜 척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런 강제적이지 않은 것에 까지 일부러 사람과 섞이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냥 평소 나처럼 내 기쁨을 표현했다. 

  또 생각나는 게 16강전 경기 중 한경기가 있던 날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자취방에 와서 탈수기능이 고장난 지하의 공용 고물 세탁기를 저주하며 베란다에서 혼자 빨래를 짜고 있었다. (그 빨래들은 나중에 결국 냄새나서 다시 빨 수 밖에 없었다.) 빨래를 짜면서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혼자 베란다에서 낑낑대며 빨래 짜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을거다.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난 그때 20살이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시대 분위기와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다행히 그 증세가 심각하지 않아서, 그럭저럭 밥값 하며 살고 있지만 때때로 조직에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성향 때문에 스스로가 너무 답답하고 불쌍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미치도록 우울하고 외로워지기도 하고.


  이 책이 모든 청소년들에게 애독서 혹은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렸을 때 나처럼 '나는 왜 다른 애들처럼 즐겁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서른 넘게나이 먹어서도 그냥 나이만 꼬박 꼬박 먹은 체, 미성숙한 나같은 어른에게도 아직도 이 책은 유효하다. 


  앞으로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 책이 생각나고 또 읽게 되고, 또... 또 위안 받으면서 이 시기를 외롭게 보낼 거라 생각한다. 아줌마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홀든 콜필드를 보며 울적해졌으면,  그리고 가엾고 이렇게도 착한 콜필드가 나랑 참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