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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의 추억

일상 2015. 12. 22. 10:21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영국 현지에서 실시한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대화 주제를 삼아 회화 연습을 많이 했다. 언젠가 주제는 영국 청춘 남녀가 연인을 만나는 경로에 대한 것이었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은 연인을 만나게 된 계기 중 1위가 채팅 사이트였다. 우리나라는 아마도 지인의 소개 겠지?

수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채팅사이트가 압도적 1위라 우리나라와 문화가 많이 다르구나 하고 좀 놀랐다.

영어 선생님 께서는 영국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여자한테 말 거는데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고,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능숙하기 때문에 채팅 사이트와 메일로 여성과 충분히 친해진 후 만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낀다고 부연 설명을 해주셨다.

(다른 얘기지만 어디선가 영국 남자들은 어떤 여자에게 말을 걸어야겠다 마음을 먹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대한으로 멋있게 꾸미고 말을 건다는 걸 어디서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엠마왓슨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제일 놀랐던 게 반바지에 슬리퍼 신고 "너 나랑 데이트할래?" 라고 말하는 미국 남자들 이었다는 토크쇼 인터뷰도 봤고.)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에 PC 통신 시절에는 랜덤 채팅이 좀 흔했던 것 같다. 난 하이텔 회원이었는데 당시 대구에 사는 동갑인 남자애와 꽤 오랜 기간 채팅을 했다. 안타깝게도 걔의 아이디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고1 때 전학을 간 이후 또래 남성과 단 한마디 대화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걔는 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또래 남자애들도 글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 이렇게 속 깊어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걔가 실제 그랬는지 나에게 꾸며낸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 그 채팅 내용을 보면 엄청 웃기겠지만,(걔나 나나 쓸데없이 진지했으니) 걔는 "어제 이러저러해서 울었다." 같은 일반 남자애들에게 들을 수 없는 얘기도 곧잘 했다. 걔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하이텔 때 채팅하던 사람들은 정중했고, 속내를 꽤 깊게 얘기했던 것 같다. "ㅋㅋㅋ" 라는 말도 없었고, 말 줄임말도 없었다.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 몇시에 접속하자. 전날 약속하고 접속해서 "오늘은 학교에서 어쩌고 저쩌고 했어.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졌어."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는데 세월과 함께 PC 통신도 사라지고, 걔와는 작별인사도 없이 얼굴도 모른 채 그냥 멀어졌다.


전화모뎀의 접속음은 항상 나를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옛날 모뎀시절 얘기를 쓰고 있자니, 나이든 티가 폴폴 난다. 나도 결국에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늙은이에 불과한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