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지막날 친구와 놀러가기로 되어 있었다. 큰 회사를 다녀서 그런지 친구는 주말마다 회사 사람들 결혼식 가기 바빴다. 유일하게 결혼식이 없는 날이 10월 31일이라고해서 모카드회사에서 여행패키지(패키지라고 하긴 부끄러운 가격 12900원!) 를 신청해서 같이 떠났다.
기억 하는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날은 비가 엄청 많이 왔다. 엄청 많이. 매우 찝찝한 여행이었지만, 매 주 집에서 누워 있는 시간이 앉아 있는 시간보다 더 길었던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외출을 하니 색다른 느낌이 났다.
파주 하면 대학교 때 다른 친구랑 갔던 여행이 떠오른다. 그 땐 봄이었는데 날씨가 엄청 좋았다. 갔다와서 다이어리에 경로를 자세히 적어놨던 기억이 난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가을인데 엄청 많이겠어? 했는데 불행히도 엄청 많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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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돌아다닐 때만 해도 비는 안왔는데 금방이라도 쏟아질 날씨였다. 말로만 듣던 헤이리는 넓고 산도 있고 좋긴 한데 왠지 전혀 관리가 안되고 있는 황무지 느낌이었다. 문 안여는 곳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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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대여해 주는 곳도 있었는데 헤이리 보려면 자전거 타는 게 딱일 것 같았다. 괜히 자전거 빌려서 타고 다니다가 빗속을 헤치며 자전거 탈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관뒀다. 일본 여행 갔을 때 보니까 우산 들고 다들 자전거 잘 타고 다니던데 어렸을 때 꽤 많이 자전거 탔음에도 불구하고 우산쓰고 자전거 타 본 적은 없다. 한손으로 탈 줄은 알지만.
헤이리를 구경하는데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왔다. 신고간 운동화가 윗 부분이 메쉬로 된 것이었는데, 거기로 물이 스물스물 기어 들어왔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느낌 중 하나가 젖은 양말 신고 있는 느낌인데 아직 갈 길이 구만리인데 헤이리에서부터 양말이 젖기 시작했다. 양말이 젖으면,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난다. 포레스트가 베트남 갔을 때 나중에 다리 잘리는 (직급 생각 안남) 선임이 무조건 양말을 자주 가라 신으라고 타이르는 장면. 동감한다. 초등학교 때는 비 많이 오는 날이면 엄마가 가방에 새 양말을 챙겨주셨다. 맨발로 학교 갈 순 없어서 샌달 신고 양말신고 그냥 학교 가서 다시 갈아 신었다. 장화도 사주시긴 했지만, 창피하다고 안 신고 갔다. 왜 그랬을까.;;;
딸기가 좋아. 지하에 GS 25가 있었던 게 기억나서, 있다가 편의점 가서 양말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아무데나 점심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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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있는 곳 들어간 것 치고는 괜찮은 식당 겸 카페에 들어갔다. 식당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이런 날 왜 돌아다니느냐고 의아해 하셨다. 야외에서 먹을 수 있는 자리도 있는 예쁜 곳 이었다. 같이 간 친구는 야외에 안고 싶어하는 마음이 굴뚝 같음이 내 눈에 포착이 되었지만, 난 아무리 위에 천막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데서 먹기도 싫고 싸늘하고 해서 그 마음을 애써 모른 척 했다. 난 나쁜친구. ; 해물 떡볶이는 매울까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먹을 만 했다. 난 궁중 떡볶이 먹고 싶었지만 친구가 야외자리 앉고 싶어하는 마음을 외면했으니 속으로 그냥 이거 먹자 하고 먹었다.
우리가 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여자 4명인 다른 팀이 왔다. 그 사람들 말로는 그 식당이 영화 촬영도 했던 식당이라고 했다.
신발 젖는게 너무 싫어서 비닐 좀 빌려서 그걸 싸매고 나갔으나 역부족이었다. 관광버스에서 오라고 한 시간이 다가와서, 바깥으로 나갔는데 한참을 헤맸다. 4번 출구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다가, 지도도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한참 헤매다가 간산히 찾아서 관광버스를 탔다. 결국 양말구입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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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프로방스 마을에 도착하여 허브 파는 곳에서 구경을 한참 한 다음 도저히 너무 축축해서 안되겠는 양말을 구입하려고 보니까 또 살 데가 마땅찮은거다. 쌩뚱맞게 캘빈클라인 매장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양말이 있길래 얼마냐고 물어보니 두둥. 만육천원!! 뉴코아아울렛에서 500원 주고 산 양말도 멀쩡하고 좋기만 한데 양말하나에 만육천원. 헐. 난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뒤로하고 급히 나왔다. 그리고 보세숍 가서 반스타킹을 만원에 구입. 후졌는데, 그 전 만육천원의 양말 여파 때문인지 비싸다는 생각 안하고 구입했다. 이날 여행의 가장 큰 에러는 내 신발이었다. 흑.
허브 매장에서 뭐 좀 구입할까 하다가 비오는데 들고다니기 귀찮다 싶어서 하나도 구입 안하고 임진각으로 이동. 임진각 맑은 때 갔음 좋을 것 같았으나, 완전 넓은 주차장이 배수가 전혀 안되서 임진각 전망대까지 가면서 험란했다. 정말로.
제대로 못보고 들어간 임진각에 있던 카페는 좋았다. 고급스럽고 휑한 느낌이었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엄청 좋은 오디오를 설치해 놓았는지, 사운드가 기가 막히는 거다. 차이코프스키가 만든 곡중에 제일 유명한 첼로곡이 나왔는데, 예전에 고등학교 때 듣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뭐 클래식에 관해선 문외한이라 곡명이랑 번호까진 못 외우겠고... 맘 같아선 다른데 다 생략하고 거기 바로 와서 음악이나 들으면서 아는 사람이랑 수다 떨고 싶었다.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관광버스를 타서 양말을 벗고 자다가 깼다가 했는데 서울에 진입하는 순간 교통이 hell 이었다. 너무 밀려서 멀미를 조금 했는데 다행히 늦지않게 교대에 도착하여, 인천 집까지 또 머나먼 여정을 거쳐 집으로 왔다. 지금 생각하니 꽤 재밌었던 거 같다. 아마 그날 안나갔으면 비오니까 귀찮아 하고 집에서 TV나 보고 있었을 것 같다. 뭐 난 그런 것도 좋아하지만.

날 알아봤을까?

일상 2009. 3. 17. 16:40

작년 휴가 때 후쿠오카에 가서 신기한 걸 하나 발견했는데 일본 여자들은 야구모자를 안 쓰고 다닌다는 거였다. 양산을 쓰거나 아니면 여성스러운 모자를 쓰고 다니더라. 그리고 또 신기한 건 운동화 신은 여자들도 없었다는 거. 컨버스 신은 여자를 오사카에서도 후쿠오카에서도 못 본 것 같다.
항상 여성스럽게 화장도 하고 구두도 신고 이쁘게 꾸미고 다니는 것 같다.
그에 반해 나는 야구모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모자 수집하는 사람 마냥 모자가 많은 건 아니지만 5천원짜리 모자부터 가장 비싼 건 3만원 넘는 모자까지 여자치고는 꽤 다양하게 모자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대학시절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거의 매일같이 모자를 쓰고 운동화 신고 다녔는데 모자 쓰면 안되는 수업에 내가 내가 모자 썼다는 사실 조차 까먹고 그냥 앉아있다가 점수가 깍였다.

동생이 저번주 월요일에 정기휴가를 마치고 복귀 했는데 휴가나오면 쓸 괜찮은 모자를 사야겠다고 하며 MLB 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 모자를 구입했다. 검정색에 금색으로 별모양 박힌건데 평소 범상치 않은 뒷통수를 자랑했던 나는 내동생 모자도 아주 잘 맞았다. 아...내동생도 모자 사이즈가 절대 작은 편이 아니라고 했는데. 동생 때문에 좋은 모자 하나 얻어서 좋다. 오예! 음 모자 얘기가 잠깐 나와서 말인데 작년 겨울 때 6만 5천원 짜리 세이부 라이온스 모자를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너무 비싸서 안샀는데 이제와서 생각하니 그건 참 잘한 짓이다.

회사에는 모자를 쓰고 다니지 못해서 주말에는 모자를 자주 쓰는 편인데 이번 주 토요일에도 모자를 쓰고 외출을 했다. 요즘에는 자고 일어나서 바로 회사오기 바빠서 화장을 전혀 안하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용감하다고 하더라. 피부도 예전 같지 않은데 흔한 비비크림조차도 안바르고;;(심지어 난 썬크림도 안 바른다-썬크림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지 그것만 바르면 얼굴에 발진이 나서...) 몰라. 그래도 화장 안하면 10분이나 더 절약되고 밥도 더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깐. 회사다닐 때도 화장을 전혀 안하는데 주말에 내가 화장을 할 리는 만무하고 나름 친구를 만나러 갔던 구월동이면 인천에서 꽤 번화가인데 춥다고 하여 춘삼월에 오리털 잠바에 운동화 신고 친구를 만났다. (한편으로는 이런 차림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에 감사하며. 은근 차려입고 만나야 할 것 같은 사람들 있지 않나? 같은 여자라도)  점심을 먹고 만났던 터라 일단은 커피만 마셨는데 쉴새없이 이야기하다보니 출출하여 스낵랩을 먹었다. 1700원이라는 절대적 가격은 싸나 내용물을 생각해보았을 때 절대 싼 가격은 아닌 스낵랩. 치킨조각 하나랑 양배추랑 머스터드 드레싱 뿌려주고 밀가루로 한 겹 싸 놓은 게 다여;;

한참 친구와 밀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 맞은 편에 혼자 앉아서 PMP로 동영상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낯익은 느낌이 들어서 자세히 보니 대학교 1학년 때 알던 애 였다. 생각해보면 걔가 날 신경을 좀 많이 쓴데다가 선물까지 줬는데 그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일생동안 날 좋아했던 남자의 숫자가 워낙 적은 터라 이러저러하게 쟤가 너 좋아한다더라 라고 들은 남자들의 이름은 거의 기억하고 있는 편인데, 역시나 걔 이름 3글자도 또렷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대학교 때도 좀 특이한 취미와 지극히 오타쿠 적인 성격 탓에 알게 모르게 나이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편입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역시나 혼자서 맥도날드서 동영상을 보다니. 약속이 있어서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던데. (은근 자세히 계속 관찰)
근 2미터도 안되는 거리에서(유난히 가까운 자리였다) 아는 체 하면 쟤가 날 알까? 혹시라도 걔랑 무지하게 닮은 애일 수도 있잖아. 아니 근데 저 키하고 얼굴을 봐서는 걔가 맞는데. 만약에 아는 체를 한다고 해도 지금 내 꼴이 너무 초라하잖아. 이런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면서 친구에게 "나 쟤 아는 애다. 아는 척 할까 말까." 라고 핸드폰 문자화면에 써서 보여주니 아는척을 해 보라는 거다. 근데 결국 아는 척 할 타이밍을 놓치고 알게 모르게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나를 눈치 챘는지 결국 걔가 먼저 자리를 떴다. 친구 말로는 걔도 나중에 너를 한 몇 초동안 쳐다보더니 알아보고는 일어난 것 같았다고 하더라.
걔도 인천 출신이라 이렇게 인천에서 만나는 게 그닥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대학 때 워낙 편협한 인간관계를 자랑했던 터라 이런 류의 우연한 만남이 신기하기만 했다. 집에 와서 다시 걔 생각을 하다가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걔가 나한테 준 선물이 무사히 있는 것이 아닌가. 크크큭. 사실 걔가 준 선물 한번도 사용 안했는데...
위에 말한 걔의 성격 탓에 걔는 나한테 한 번도 적극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가끔 문자보낸 거나 메신저에서 말했던 거나 선물 줄 때 했던 말들이 생각나니 갑자기 그 때 걔나 나나 귀여워졌다. 아는 척 해볼걸 그랬나? 흐흐.
다음에 또 그 쪽에서 만나게 되면 꼭 아는 척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꼭 다시는 못 만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