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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8 비오는 9월 마지막 일요일 밤

   약속이 없는 주말이었다. 20살 때 이후로 쭉 약속 없는 주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속 없는 주말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을 거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은 풍요로운 인생에 있어서 필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외로움을 위해 같이 있어 줄 것을 구걸하는 것도 구차하고, 나는 지금 같은 처지가 참 편안하고 안락하다. 누군가는 정신승리라고 비웃을지라도, 정말이다. 물론 정말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함께 기뻐할 사람이 없음에 아주 가끔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만약 이렇게 평생 고독하게 사는 게 내 운명이라면 기꺼이 감사하며 살 수 있다.

 

  저번주에는 1년 전부터 나를 가르쳐 준 학원 영국 남자 선생님께 여행가서 사온 선물을 드렸다. 선생님이 여자친구와 같이 살고 있는 걸 알기에 여자친구 선물도 함께 사서 줬는데 다 합쳐서 8유로 밖에 안들었으니, 비싼 선물은 아니었다.

  어제 그 선생님이 니 선물 진짜 예쁘고 거깃다 실용적이기 까지 하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나한테 인사하는데 기분이 좋았다. 이런게 여행의 재미 중 하나구나 싶었다. 다녀와서 기념품 주고 그 기념품 보면서 좋아하는 지인들을 보는 거 말이다.

  참고로 선생님 선물은 포츠담 상수시 궁전 벽지가 그려진 (특이하게 공작새가 그려져 있다) 안경 타올 이었고, 선생님 여자친구 선물은 역시 궁전 벽지가 그려진 (장미 모양) 손거울 이었다.

 

  여행에서 다녀오자마자, 모든 게 아득할만큼 골치아픈 일이 회사에서 펑펑 터지고, 회사 사람들은 안그래도 힘든데 자꾸 정떨어지게 굴어서 심적으로 한동안 힘들었다. 저번주에는 다행히 그 모든 일들이 어느 정도는 마무리 되고, 내가 뭘 더 바라겠냐는 심정으로 회사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포기하니 오히려 일이 술술 풀렸다. 결국 금요일에는 할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거의 놀다가 퇴근했다. 비오는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인터넷 교통상황 보니 차가 밀려도 너무 밀려서 그냥 8시 30분까지 회사에 눌러 앉아 있었다. 덕분에 런던 포스팅도 완성했으니 수확없는 늦은 퇴근은 아니었지.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거나, 평일에 못 읽었던 책이나 중앙선데이 신문을 읽고 밤에는 보고 싶었던 영화 한편을 본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토요일인데, 이 기준에 의하면 어제는 완벽했다. 요즘 올레티비로 보고 싶었던 영화 보는 것 마다 다 내 맘에 쏙 들어서 흡족하다. 어제는 '바스터즈:거친녀석들'을 봤는데, 근래 본 영화 중 제일 자극적인데도 제일 통쾌한 끝내주는 영화였다.

 

  엄마가 제주도 다녀온 뒤로 인천을 한번도 못 벗어나서 그런지 요즘 부쩍 울적하셨다. 인천을 한번도 못 벗어났다는 의미는 나무와 꽃을 못봤다는 것과 동의어다. 우리 동네 정말 삭막하고 계절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는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먼지만 가득한 동네다. 그러니 집값 싼 거겠지만.

  그래서 오늘 가까운 월미도라도 가자 하고 나섰는데, 항상 시끄럽고 천박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낡은 놀이기구들 있는 부근만 가다가 오늘 그 바로 전 정거장인 월미공원에 갔는데 무섭도록 조용한 점이 좋았다. 지금이야 무슨 국화 축제 한다고 해서 사람이 좀 있는데, 이런 축제 기간이 아니라면 공원 안에 한 10명 남짓 있을 것 같이 작고 조용한 공원이었다. 공원 내 큰 검정 돌판에 새겨진 "월미도 연표" 가 참 재밌었다. 효종 때 부터 월미도가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적어놓은 연표였는데, 병인양요, 갑신정변, 경술국치, 인천상륙작전 등과 맞물린 월미도의 운명이 시간 별로 서술되어 있었다.

  난 역사에 있어서는 거의 까막눈에 가까운데, 국사 시간에 배웠던 그 모든 사건과 관계 있는 곳을 버스타고 15분만 나오면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역사를 모르지만, 결국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하잘 것 없는 사람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혀 관계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난 우리나라가 좋다. 뜬금없지만.

 

 

 

 

 

  난 꽃다발 받는 건 싫어하는데 땅에 뿌리박고 있는 꽃을 보는 건 참 좋아한다. 이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어떤 꽃이든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세상에 못생겼다고 생각한 꽃은 한번도 없었다.

 

  월미공원에서 월미산도 보고 소나무 바라보면서 걸어서 월미도까지 왔는데, 코메디같은 월미은하레일 기둥과 무지비하게 큰 고철덩어리 레일 때문에 월미도는 완전히 흉물의 전시장 같이 변해있었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기 전의 월미도는 좋았다. 석양을 보고 싶으면 난 가끔 월미도까지 갔다가 오곤 했는데.. 지금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월미도와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이 동네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1970년 이후로 아무도 신경도 안쓴 것 처럼 방치된 건물들과 거리였다. 어떤 장소에도 '흥망성쇠'의 운명이 있는데 이 동네의 매력은 '흥'과 '성'이 지나가 버린 '망'과 '쇠'를 느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나한테는.

 

  인천시청이 제발 무식하고 조잡한 장식물 같은 거 이제 그만 만들고, 니들 알아서 그냥 살라고하고 계속 이 동네를 방치해줬으면 좋겠다. 물론 화장실 같은 편의 시설 만들어 주는 건 찬성이지만, 이상한 장식물 같은 건 제발 그만 해줬으면 좋겠다.

  한 때 월미도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인천시청이 자꾸 오래된 월미도를 망쳐놓는 걸 보는 게 괴롭다.

 

다음 주는 개천절이 있어서 인지 일요일 밤인데도 이상하게 슬프지 않다. 책 좀 더 보다가 잠들면 완벽한 마무리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