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夜雨中 - 최치원

위로 2010. 1. 1. 00:25
秋夜雨中

秋風唯苦吟 하니
世路少知音 이라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이라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니
세상에 알아 주는이 없네
창 밖에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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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말한 한자공부를 아직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교재 안에서 한시가 나오는데 위에 시를 보고 마음이 찡해졌다.
특히 등전만리심 이라는 부분이 최고다.
몇백년 전 최치원이 쓴 시로 인해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록은 정말 위대한 것 같다.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을 하고 싶은데 기억 안난다)
이 시를 읽다가 중3때 대머리 한자 선생님이 생각났다.
아직 결혼도 안한 젊은 나이의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아주 훤한 대머리셨다.
한자 책에 나와있는 한시를 어찌나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시는지 한시 해석해주시면서 정말 멋있지 않냐고 여러번 강조를 했으나 워낙 만만한 이미지 였기 때문에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수업시간은 항상 정말 시끄러웠다.
중학교 1학년 2학년때까지 공부랑 담을 쌓은 나는 꼭 암기해야 백점을 맞을 수 있는 한자는 32점 맞은 적도 있을 만큼 취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중학교 3학년때는 나름 그 선생님이 멋있다고 한 한시들에 감동받은 바도 있고, 재미도 있고 해서 꽤 열심히 공부했다.
저 한시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갑자기 중3 한자 선생님이 생각나서, 중학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중3때 대머리 한자 선생님 생각나냐고 했더니 생각난다며 이름은 기억 안난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오늘도 그 중학교 친구를 만나서 이 한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친구 말로는 고등학교 언어영역 공부할 때 이 시가 무지하게 많이 나왔다고 했다. 근데 왜 나는 기억이 안나지.
오늘은 그 중학교 친구 만나기 전에 정읍에서 올라온 친구도 만났는데 나랑 만나는 시간 중 반이 넘는 3시간을 나 미용실에서 파마하는 거 기다려줘서 진짜 미안해 죽을뻔 했는데 집에서 콜이 와서 그 보답도 하기 전에 집에 가버렸다. 내일 걔네 집이라도 놀러갈까 생각 중이다.
2010년 난 아무 생각 안드는데, 아마 주변에서 더 난리들 이겠지.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시도조차 못해보고 이렇게 시들어 가는 내가 조금이라도 용기를 낼 수 있게, 가족 중 한 명이 나한테 힘을 줬으면 좋겠다.
이건 정말 후레자식 같은 말이고 블로그에 써서 안될 말 같지만, 요즘에는 모르겠다. 난 솔직히 요즘 가족도 내 편이 전혀 안되주는 것 때문에 너무 힘들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단 한 달이라도 살고 싶은 생각 뿐이다.

모두들 해피 뉴 이어.

난 중3 3월 말에 대전에서 인천으로 전학왔다. 전학 수속 때문에 교육청에 갔던 때가 생각난다. 아빠가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더니 남녀공학으로 갈래 여중으로 갈래? 이러시길래 그냥 여중 갈래요. 이래서 나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아주 가까운 여중에 다니게 되었다.
대전과 인천은 정말 딴판인 도시다. 난 중3때 전학와서 고1 여름에 다시 전학을 갈 때까지 내내 인천에 전혀 적응을 못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낯선 시절이다. 앞으로는 그런 낯선 내 모습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다. 일부러 우울해지려고 노력했던 시기라고 하면 웃기지만 실상이 그랬다. 난 신체발달도 다른 애들이 비해 엄청 느렸고, 그 덕에 사춘기도 늦었는데 중3때가 되어서야 사춘기가 와버린거다.
그 시기에 전학은 날 정말 힘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멀쩡히 있다가 집에만 오면 자기 직전까지 울다 잠들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다시 학교가선 잠 많이 자서 부었나보다고 말하고 그냥 또 수업 잘듣고, 또 집에와선 울고. 동복입을 때 전학을 와선 하복 입을 때까지 나는 하루에 한번이상 안 울었던 날이 없다. 내 기분과는 반대로 성적은 수직 상승을 거듭했고, 대전에서는 오늘이 시험인지 아닌지도 모른채로 학교와선 다 찍고 그냥 엎드려 자고 100점 만점에 32점을 맞고 평균 60점 맞고 담배피고 술마시며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애들과 놀던 불량 청소년 생활을 인천에 와서는 완전히 청산했다. 32점 맞던 과목을 중3 땐 심심치 않게 100점도 맞았으니 성적면에 있어서는 인천으로의 전학이 꽤나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인간인 줄 알았고 공부 잘하는 게 굉장히 힘든 건 줄 알았는데 진득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하면 누구나 다 되는 게 공부구나. 혹은 아.. 뭐 내가 머리가 완전 꼴통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공부에 있어선 자신감도 얻었다. 하지만 난 친구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전학을 가서도 난 친구가 없었다. 그냥 친구들은 있었지만 단짝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때 단짝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없어본 자 만이 알 수 있다.
대학교에 와서 힘든 일도 많았고, 지금 직장 생활도 많이 힘들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로 우울했던 시기를 꼽아보라면 아직까지도 당연히 중3부터 고1까지 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전혀 치유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과거라 생각만 해도 진저리 칠 정도로 싫다. (이래서 발달 장애라는 것이 무서운 거다)
예전 홈페이지나 블로그에는 내 16살에서 17살 까지의 기억에 대해서 많이 썼는데, 예전에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나보다. 그 시기에 대해 쓰려면 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을 쓰고 난 후에는 또 그 때의 잔상에 시달려야만 한다.
복잡한 사정에 의해 나는 엄마와 헤어져 이모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미 난 다시 전학을 간다는 사실을 알고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이 고등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선생님한테 잘보이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내 성적은 다시 급하강을 거듭하여 전교등수는 약 300등 넘게 떨어졌다. 반등수로 30등이 떨어졌으니 말 다한거다. 이때문에 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에 평어는 거의 다 양 과 가 를 기록하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나 고등학교 때 양하고 가 하도 많아서 양갓집 규수였다고 농담 하지만, 그 때는 거의 인생 포기한 채로 살았다. 이모네 집에서 그냥 택시 타고 늦게만큼 학교오고 시험을 보든 말든 상관도 안했다. 우리 엄마아빠가 학교 선생한테 얘는 전학갈 애라고 말해놓은 터라 선생들도 내가 뭘하든 전혀 상관을 안했다.
중3때는 인천에서 계속 사는 줄 알고 그래도 친구들하고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공부도 하고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활달하려고 노력했던 애가 고등학교 오자마자 딴사람처럼 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도 계속 친구 해주는 애는 없었다. 애초에 중3때 전학와서 알고 지낸지 1년 밖에 안된 애한테 뭐하러 그렇게 해주겠나.

그런데 그 시기에 유일하게 내 곁에 있었던 친구가 있다. 그 당시에 나는 걔한테 단짝이 되지 못했다. 이미 그 친구도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친했던 단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중학교 때도,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못나게 구는 때에도 그나마 내 곁에 있으면서 편지 써주고 내 얘기 들어주는 사람은 선생도 이모도 이종사촌언니도 아닌 내친구 민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학창시절에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 알수 있다)
아직까지도 내 인생 최대의 컴플렉스로 남아있는 학창시절에 유일한 친구는 민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다시 전학을 가서는 헤어져 있었지만 우리 둘은 싸우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기도 하면서 대학교 때문에 내가 다시 올라오면서 만났다. 대학교 때 부터는 우리 둘은 단짝이 되었다. 집도 가까웠고, 20살이 넘은 우리는 의외로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전에는 민양이 길가다가 다리가 꼬여서 넘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니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 친구는 분명히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그대로 넘어졌을 거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둘은 서로의 행동에 대해 빤하니까.
오늘도 그 친구와 하루종일 같이 놀았다. 난 스탬프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친구에게 새로운 스탬프 세트를 선물했다. 연인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데 이런 걸 챙기는 게 참 우습지만, 오늘 이렇게 나름대로 선물도 주고 받고 사진도 찍고 고등학교때 자주 가던 부평역까지 가서 웃고 떠든 이유는 우리가 알게 된 지 10년이 되었다!!! 라면서 자축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이든 낯설어 지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보통 그 낯선 시기는 힘든 시기일 때랑 겹치는 것 같다. 최고의 활달함을 자랑하던 내친구 민양도 가장 친한친구인 나에게 조차 낯설어지는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행히 걔도 나도 그 낯선 시기는 다 넘겼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둘다 그 낯선 시기에도 곁에 있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내친구 민양에게 너무 감사하다. 16살 이후의 내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민양! 36살되어서도 같이 친구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