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우스갯 소리로 어떤 선배가 ‘야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지금이 최고 잘 사는거야. 우리가 언제 중국보다 잘 살았던 적이 있었냐?’ 라고 말했는데 예전부터 아시아 초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이 지금은 심심치 않게 어이 없는 나라가 되고 있다. 요즘 보면 일본보다 중국이 더 싫다는 한국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인터넷 에서도 심심치 않게 노골적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렇고. 사실 나도 밑에 사진 보고 엄청 웃긴 했지만 말이다.
이 사진은 작년 베이징의 모습인데 올림픽 때문에 시민들이 꽃을 열심히 심고 있는 모습.... 이 아니라 꽃을 집으로 가져가려고 심어놓은 꽃을 다 뽑아가는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어찌되었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중국을 무조건 비웃을 수 없는 이유는 역사 보다는 어렸을 적 좋아했던 중국 영화들 때문이다. 내가 지겹도록 잔상에 시달렸던 영화도, 세상에서 최고로 슬프다고 생각했던 영화도 거의 중국산이니 말이다. ‘왜 우리나라는 저런 영화 흉내도 못 내는 거냐.’ 라고 불평을 한 적도 여러 번. 거기에 중국이 그냥 그 중국 본토만 중국이 아니라 홍콩도 중국이고 대만도 알고 보면 중국의 뿌리고. 그 동네 출신의 세계적 감독이 도대체 몇 명이냔 말이다. (인구가 많으니 당연하다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얘기가 길어졌지만, 내가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루쉰’ 때문이다. 생일선물로 받아서 다시 한번 읽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원제:조화석습 朝花夕拾)는 내가 가장 여리고 외로웠던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똥통 중에 똥통이었던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진짜 선생님 같았던)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은 책이었다. 그 선생님은 이런 책이 나중에 논술 같은 거에 도움 되는 책이라면서 주셨는데, 뭐 나는 논술 보는 일류대학은 원서도 쓰지 못하는 성적이었는데. 으흐흐 (근데 그 해 서울대 논술에 아큐정전이 지문으로 나왔으니 그 선생님 약간은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건가??)
요즘에는 좀 덜하지만 난 원래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책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데 선수였다.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그만큼 그 책이 좋았다는 건데,
다시 읽었는데 별로면, 아 내가 왜 이런 책을 좋아했었지. 유치했구나. 하는데 한편으론 내가 좀 그래도 컸구나. 하면서 뿌듯하고. 다시 읽었음에도 좋으면. 아 역시 좋구나. 라면서 왠지 배신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 좋고 그런다.
다시 읽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는 날 배신하지 않는 쪽이었다. 중국 역사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아는 바가 있음 훨씬 더 심도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나같이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루쉰이 이야기 하고 있는 그 당시 중국의 상황과 문제점이 현재 우리나라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읽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또한, ‘루쉰’ 자체가 너무 멋있어 주시니까. 딱히 별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냥 그 자체로 너무 멋있으신 분이다.
신문을 파는 소년이 전차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나, 베이징에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물의 속성을 모르면 함부로 물에 뛰어들지 말라고 말하는 (이런 세심한 것까지!) 모습이나, 대단한 혁명가라면 한 두 사람 쯤의 희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도저히 사람이 죽는 것에 초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습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도 아니고 직접 혁명의 한 가운데서 싸운 게릴라도 아니지만, 그 ‘인간미’ 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하나. (뭐 이리 거창해 진다냐) 너무 대단해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기 보다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아버지 같다고 해야 하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셔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의 초반부를 읽다 보면
중국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인 거 아닌가. 이렇게 중국 고유의 전통까지 비판해야 하나. 너무 서양문물만 우선시 하는 거 아닐까? 등등의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뒤로 갈수록 루쉰이 그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므로)
지금 내 상황이 회사 내부 사정과 결부되어 있어서 블로그에 구구절절하게 써놓을 수는 없지만 대충 뭉뚱거려 표현하자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어쩌면 혹시 될지도 모르니까 난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겠소.’ 이 상태랄까? 그래서인지 이 책이 큰 위로가 되었다. ‘희망’ 이라는 메시지 때문에. 요즘 위에 말한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포기하는 단계이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에 이 책에 대한 것을 다 쓰면 내 블로그 역사상 최고로 긴 포스팅이 될 듯 하여 두 개로 나누어야겠다. 다음 페이지는 루쉰 소개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좋았던 구절 모음. 회사에서 하라는 일은 안하고 시간 날 때 이런 거나 쳤다. 헐; (그 때문에 이제서야 책 정리가 끝났지만)
P.S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의 원제인 ‘조화석습 ( 朝花夕拾)’ 이란.
: 아침에 떨어진 꽃을 바로 쓸어내지 않고 해가 진 다음에 치운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더 해석하자면 떨어진 꽃에서도 꽃의 아름다움과 꽃의 향기를 취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멋있는 뜻이라고 합니다.
루쉰 魯迅 : 1881~1936 :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작가, 문학사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련(周樹人)이다. 일본 유학 시절 의학을 공부하다가 병든 육체보다 중국인들의 병든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이 소개글은 책에 써 있는 건데, 이 부분 좀 오바다. 꼭 이렇게 까지 써야하나? 헐;;)문학으로 전환한다. 봉건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일생을 중국 현실의 변혁을 위해 살았다. 새로운 역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위해 중국의 문명과 중국 현실을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하는 한편, 봉건주의와 근대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시각을 지닌 문명비판을 전개하였다. 그런 글들은 ‘잡문(雜文)’ 혹은 ‘잡감(雜感)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조하였고, 총 20여권의 산문집으로 묶었다. 또한 <광인일기(狂人日記)> (1918)를 시작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고향(故鄕)>(1921), <아큐정전(阿Q正傳)>(1921), 등을 발표하였고, 그의 소설은 <<외침吶喊>>(1923), <<방황(彷徨>>(1926), <<고사신편(故事新編)>>(1936), 등의 소설집에 실렸다. 루쉰은 중국 근현대인들에게 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이래 우리 현실을 읽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일러두기.
1.저본으로<<魯迅全集>>(人民文學出版社, 1981)을 사용하였다.
2.출처 표기중 <>은 글의 원제목이고, << >>은 그 글이 실린 책의 제목이며, 숫자는 <<魯迅全集>>의 권수와 페이지, 그리고 발표된 연도순이다.
3.각 글의 제목은 되도록 원제목을 그대로 따랐고, 제목이 없는 글에 제목을 달거나 불가피하게 제목을 바꾼 경우, 출처에 ‘원제’라고 명시하였다.
제 1 부. 길은 영원히 있다.
l‘청년과 지도자’
요즘 들어 청년이란 말이 유행이다. 입만 열면 청년이요, 입을 닫아도 청년이다. 그러나 청년이라 하여 어찌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중에는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잠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미한 자도 있고, 누워 있는 자, 놀고 있는 자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전진하려는 자도 있다.
전진하려는 청년들은 대체로 지도자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영원히 지도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찾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행운이다.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라면 지도자의 자리를 사양할 것이다. 지도자이길 자임하고 나서는 자가 과연 나아갈 길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길을 안다고 나서는 자들은 대개 30세가 넘고, 빛이 바래고 노티가 흐르는 자들로, 그저 원만하다는 것 뿐인데 자신이 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정말 길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벌써 자기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을 것이고, 지금껏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을 리 없다. 불법을 설교하는 스님이든 신선의 약을 파는 도사이든, 언젠가는 우리와 똑같이 백골로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게 극락으로 가는 이치를 묻고 하늘나라에 갈 비결을 구하려 하니, 실로 가소로운 일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들과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럴수 있다. 말하는 사람은 그저 이야기나 할 줄 알고, 붓이나 놀리는 사람은 그저 붓이나 놀릴 줄 안다. 그런데 누가 그더러 주먹을 쓰라고 하면 그것은 시키는 사람 잘못이다. 주먹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진작 주먹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아마 재주넘기를 하려고 할 것이다.
일부 청년들은 벌써 각성한 것으로 보인다. <<징바이푸칸 京報副刊>>에서 청년들의 필독서를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믿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어!” 비록 살벌한 상황이지만 나도 대담하게 한 마디 한다면, 자기 자신조차도 꼭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들은 기억력이 좋지 않다. 이것 역시 인생에, 특히 중국에서는 고통스러운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것이다. 기억력이 좋으면 아마 그 무거운 고통에 짓눌려 압사할 것이다. 기억력이 나빠야 적자생존할 수 있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어찌어찌하여 오늘은 옳은데, 어제는 잘못되었다거나 겉과 속이 다르다거나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싸운다거나 하는 일을 떠올린다. 우리들은 아직 굶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아무도 없을 때 남의 밥그릇을 넘본 적이 없다. 죽을 정도로 가난하여 남몰래 남의 돈을 넘본 적이 없고, 성욕이 넘쳐서 이성을 보고는 아름답다고 느낀 적도 없다. 그러기에 나는 큰소리를 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본다. 기억력이 좋다면 나중에 그때에 가서 얼굴이 붉어질 테니까.
혹시 자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믿음직스러울지도 모른다. 청년들이 금 간판이나 내 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생존의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힌 낡은 길을 찾아 무엇 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 할 것인가!
-<導師>, <<華蓋集>>, 3:55~56, 1925
제 3 부. 외침, 그리고 반항.
l‘철의 방에서 외치다.’
나도 젊었을 때는 꿈이 많았다. 후에 대부분은 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그걸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도 하지만, 때로는 쓸쓸하게도 한다. 마음 속 실 한 올을 지나가버린 쓸쓸한 시간에 매어둔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한 데서 고통을 느낀다. 그런 완전히 잊혀지지 않은 일부로 인해 여기 <<외침 (원제 : 吶喊)>> 이란 소설집을 엮었다.
나는 4년 남짓한 동안, 자주 아니 거의 매일 전당포와 약방을 드나들었다. 몇 살때인지는 잊었지만, 아무튼 약방 카운터가 내 키만큼 높았고, 전당포의 카운터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었다. 나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는 카운터 위에 옷이며 장신구 따위를 올려놓고, 전당포 주인의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다시 내 키만큼 높은 한약방 카운터로 가서 오랫동안 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약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일로 바빴다. 약을 처방한 의원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처방에 소용되는 보조약도 아주 기이한 것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한겨울의 갈대 뿌리라든가, 삼 년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교미 중인 귀뚜라미, 열매 맺힌 평지목 등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병은 날로 심해졌고, 끝내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넉넉한 집안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가난에 떨어졌을 때, 그 추락의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N시로 가서 K학당에 입학하려 한 것은 아마 다른 길,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8위안의 여비를 마련해주시며, 네 맘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우셨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는 경서(經書)를 배워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것이 정도였다. 양학(洋學)을 배우다는 것은, 궁지에 몰린 사람이 서양 오랑캐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짓이라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로서 당신의 자식을 볼 수 없다는 슬픔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결국 N시로 가서 K학당에 입학하였다. 이 학당에서 나는 비로소 세상에는 소위 물리라든가 수학, 지리, 역사, 미술, 체육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리학은 별로 배우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목판본인 <<전신신체론>>이니 <<과학위생론>>이니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던 옛날 의원들의 이론이나 처방을 새로운 지식들과 비교해 보고는, 한방 의술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결국은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동시에 한의원들에게 속은 환자가 환자의 가족들에게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일본사에 관한 번역본을 통하여 일본의 유신 維新은 대부분 서양 의학에서 발단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런 유치한 지식 덕분에, 나는 일본의 어느 시골 의학 전문학교에 적 籍을 두게 되었다.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졸업을 하고 귀국하면 내 아버지처럼 잘못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리라. 전쟁이 일어나면 군의가 되고, 한편으로는 유신의 신앙을 촉진시켜 주리라, 이런 꿈들로 부풀어 있었다.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방법이 지금은 얼마나 진보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환등기를 사용하여 미생물의 형태를 비춰 보여주었다. 그런데 가끔 강의를 다하고도 시간이 남을 때면 교수님은 풍경이나 시사에 관련되는 필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시간을 때우곤 하였다. 그때가 마침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라 자연히 전쟁에 관한 필름이 많았다. 나도 강당에서 필름을 보며, 항상 동료들의 박수갈채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마침 화면에서 오래 전에 헤어졌던 많은 중국인들을 보았다. 가운데에 한 사람이 묶여 있고,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었다. 모두 건장한 체격이긴 했지만, 넋이 빠진 듯 멍한 표정들이었다. 해설에 따르면, 묶여 있는 중국 사람은 러시아 스파이로, 일본군의 기밀을 정탐했기 때문에 본때를 보이기 위해 목을 자른다는 것이었다.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은, 본보기가 될 이 일을 감상하기 위해 나온 구경꾼들이라고 했다.
그 해 공부가 채 끝내지 않고, 나는 도쿄로 나와버렸다. 그 필름을 본 뒤로는 의학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해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이 될 뿐이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첫째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다. 정신을 개혁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문예 운동을 제창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도쿄 유학생들은 대부분이 법학이나 정치, 물리, 화학, 경찰학, 공업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고, 문학이나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다행히 몇몇의 둥지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명의 둥지를 모아 의논한 결과, 무엇보다 잡지를 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잡지 이름은 ‘새로운 생명’이란 의미를 달기로 하고, 그 당시 우리들은 당시의 복고적인 경향에 맞추어 <<신성 (원제:新生)>>이라 하기로 하였다.
<<신성>>의 출판 날짜가 다가왔는데, 맨 먼저 원고를 담당한 몇 사람이 자취를 감추더니, 뒤이어 자본을 댈 사람마저 도망가 버렸고, 결국 일 전 한 푼 없는 세 사람만 남았다.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이미 세태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에 실패했을 때도 물론 할말이 없었다. 게다가 뒤에 남은 세 사람도 서로 자신의 운명에 쫓겨 한자리에 모여 장래의 꿈에 대해 기탄 없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탄생시키지 못했던 <<신성>>의 결말이다.
내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무료함을 느낀 것은 그 일이 있고 나서다. 그 당시에는 까닭을 몰랐다. 뒤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주장이 남의 찬성을 얻으면 전진하는 데 힘을 얻고, 반대를 받으면 분발을 촉진한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다. 이 얼마나 큰 비애인가!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적막이었다.
그 적막감은 하루하루 자라났고, 독사처럼 내 영혼을 감아왔다.
나는 끝없는 비애 속에 빠져 있었지만, 결코 이 때문에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 경험이나 나를 반성하게 만들고,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한 손을 높이 쳐들고 외치면 이에 호응하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그런 영웅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 자신의 적막감만은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내 자신의 영혼을 마취시키고, 나를 국민들 속에 몰입시켜 고대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 뒤에도 더욱 적막하고 비애감을 몇 차례 직접 경험하고 구경도 하였지만, 모두 돌이켜 생각하기 조차 싫었고, 그것들과 내 머리를 한꺼번에 진흙 속에라도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취법이 효과가 있었던지, 청년 시절의 비분강개하던 생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S회관에는 세 칸짜리 방이 하나 있었다. 마당에 있는 홰나무에는 전에 한 여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그 홰나무는 사람이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라 있지만, 그 방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몇 년동안, 나는 그 방에 틀어박혀 옛날 비문을 베끼고 있었다. 손님도 별로 없었고, 옛 비문 속에서 나는 무슨 ‘문제’ 나 ‘주의 (主義)’ 를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면서 나의 생명은 점점 깜깜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것이 또한 나의 유일한 바람이기도 했다. 여름밤, 모기가 극성이었다. 부채질을 하며 홰나무 아래 앉아 무성한 잎 사이로 반짝이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늦게 나온 홰나무 벌레가 섬뜩하게 목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그때 가끔 놀러와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사람은 옛 친구인 진신이(金心異) 였다. 그는 커다란 가죽 가방을 낡은 책상 위에 놓고 웃옷을 벗어 던지고는 마주 앉았다. 개를 무서워했기에 그때까지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양이었다.
“자네 이런 건 베껴서 뭐하려고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는 내가 베낀 옛 비문의 초본을 펼쳐보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무 소용도 없지.”
“그럼 뭐하려 베끼나?”
“아무 이유도 없어.”
“내 생각엔 말야. 자네가 글을 좀 써보는 게 어떨까 싶어……”
나는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신청년>>이란 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특별히 찬성하는 사람도, 그렇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필시 그들도 아마 적막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머잖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 그러나 잠든 상태에서 죽어가니까 죽음의 비애는 느끼지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 비교적 개어 있는 몇 사람을 일으켜 그 불행한 몇 사람들이 구제할 길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게 한다면 도리어 그들에게 미안한 일 아닐까?”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내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희망이라는 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미래에 속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주장으로,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꺽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쓰겠다고 응답했다. 이것이 처녀작인 <광인일기>이다. 그때부터 이왕 발을 내디딘 이상 되돌릴 수도 없고 하여, 친구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소설 비슷한 글을 썼고, 그렇게 쌓인 것이 십여 편에 이르렀다.
나는 내 자신을 이미 절박한 상태에 이르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가졌던 적막한 비애를 그때까지도 채 씻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간혹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는 적막 속에서 돌진하고 있는 용사들에게 다소간의 위로를 주고, 그들이 흔쾌히 선구자로 떨쳐 나가게 한 점에서 스스로 다소나마 위안을 얻기도 하였다. 나의 외침이 용맹스러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증오스런 것인지, 가소로운 것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외침인 이상, 당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들어야 했기에, 가끔 내 ‘곡필 (曲筆)’을 들어 <약>에서는 위얼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았고, <내일>에서는 산쓰 아주머니가 아들을 만나는 꿈을 꾸도록 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지휘관이 소극적인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내가 겪기에 고통스러웠던 적막감을, 내 젊은 시절과 같이 꿈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면, 나의 소설이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전히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게다가 한 권의 책으로 낼 기회까지 얻고 보니 어쨌든 운이 참 좋은 셈이다. 운이 좋았다는 점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만, 잠시동안 이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읽어줄 이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전히 기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단편들을 함께 모아 인쇄에 부치고, 앞에서 말한 연유로 하여 <<외침>> 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하였다.
1922년 12월 3일 베이징에서 루쉰
-<<訥喊>> 自序, <<訥喊>>, 1:415~420, 1923
P. S 위에 올려놓은 글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글 두편임. 숨어 있는 글을 펼치면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겠지만, 내가 워드 파일로 작성한 건 더 길다. 작성도 아니고 배껴놓은 것이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심심하시다면 첨부파일을 다운 받아서 술술 읽어보셔도 무방 하겠지만, 무식하게 이걸 다 손수 쳤느냐는 말을 들을까봐 살짝 두렵다. 책 어디에도 무단복제 금한단 말이 없어서 저지른 짓이다. (단, 빨리 쳤기 때문에 오타가 있을 수 있고 책임지지 않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