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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0 '폭풍의 언덕' 을 읽고

폭풍의 언덕
국내도서
저자 :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e) / 김종길역
출판 : 민음사 200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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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제일 가깝게 지냈지만 어느날 갑자기 내 곁에서 종적을 감춰버린 내 친구 제이 는 이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책을 워낙 많이 읽던 친구였는데... 가끔 그 친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면서 그리운 감정을 느낀다.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걸까.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이제 볼 수 없지만 나는 현재 그 친구의 모습을 어쩐지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왜냐면 내가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처럼 그 친구도 그대로일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좋아하던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제서야 이 소설을 읽었다. 중학생 때 '제인에어' 를 읽다가 지루함에 못이겨 결국 중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어서 (아직도 안읽음) 같은 시대를 다룬데다 샬롯 브론테의 자매가 쓴 이 작품도 이상하게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 은 '제인에어' 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고, 나는 한동안 이 소설에 푹 빠져 잠도 제대로 안자며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에밀리 브론테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인 '폭풍의 언덕'을 남기고 병에 걸려 30살에 죽었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불꽃같은 열정으로 남은 생명을 쥐어짜내가며 소설을 썼을 작가를 떠올리니 눈물이 고였다. 작가가 생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써내려간 소설이라 그런지 이 소설은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어둡고 우울했다.


  서로 깊은 상처를 주기만 하는 캐서린 언쇼와 히스클리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나마 그 둘은 불행하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중학생 때 '제인에어' 대신 '폭풍의 언덕' 을 읽었다면, 이런 처절하고 비극적인 사랑을 꿈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캐서린 언쇼가 죽고난 뒤에도 엄청나게 남아있는 책의 남은 페이지를 보며 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더 써져 있는 것일까?! 란 생각에 의아했는데 그 뒤는 헤어튼 언쇼와 캐서린 린튼의 또 다른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이 소설에서 제일 내 맘에 드는 인물은 의외로 헤어튼이다. 캐서린을 사랑하면서도 조금만 수가 틀어지면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자기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캐서린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몰래 글을 배우는 그는 히스클리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귀족적 품위를 희미하게나마 간직한 남자다. 나는 마지막에 캐서린과 헤어튼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분이 어찌나 좋든지 그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어느새 캐서린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애정 표현도 거리낌 없이 하는 헤어튼이 귀여웠다.


  거리의 아이로 고된 학대를 견디고, 삶의 유일한 이유였던 캐서린 마저 잃은 히스클리프의 심정을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캐서린 언쇼가 죽은 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행하는 악행은 계속 읽기 괴로웠다. 야만스럽지만 숙명처럼 끌릴 수 밖에 없는 악마적 매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의 전형인 히스클리프는 분명 문학 역사에서도 기념비적 인물 중 하나겠지만, 글쎄.. 히스클리프에게 사로잡히기에는 이제 내 나이가 너무 많나보다. 더 어렸을 때 읽었다면 내 친구 제이처럼 히스클리프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적이었는지 알겠어. 왜 나를 경멸했지?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어. 캐시? 나로선 위로할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어. 당신에게는 그래 마땅해.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인 거야. 그래, 나에게 입맞추고 울려면 울어도 좋아. 나의 입맞춤과 눈물을 빼앗으려면 빼앗아도 좋아. 그러면 당신은 더욱 시들 것이고, 자신을 저주하게 될 거야.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대답해봐. 린튼에 대한 어리석인 생각 때문이었어?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아, 당신 같으면 마음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p.263


감상 외 잡생각들.


 1. 등장인물들의 가족관계

* Wuthering Heights 저택 (언쇼 집안)  : 힌들리 언쇼(오빠) - 캐서린 언쇼(여동생) 남매 / 입양한 히스클리프

* Thrushcross 저택 (린튼 집안) : 에드거 린튼(오빠) - 이자벨라 린튼(여동생) 남매


2. 등장인물들의 혼인 및 자녀

* 힌들리 언쇼 - 프랜시스 혼인 : 아들 헤어튼 언쇼

* 에드거 린튼 - 캐서린 언쇼 혼인 : 딸 캐서린 린튼

* 히스클리프 - 이자벨라 린튼 혼인 : 아들 린튼 히스클리프


  구글에서 찾아보니 폭풍의 언덕을 읽던 사람들이 그린 가계도 같은 사진이 많았다. 나 역시 소설을 읽다가 캐서린 죽었다면서 여기 왜 또 캐서린이 있지? 이런 생각에 혼자 노트에 막 가계도를 그려보았다.

  음... 주요 주인공들의 2세들이 부모 중 누구의 성향을 더 많이 물려받았는지 상징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작가는 이런 식의 작명을 했던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다른 이름으로 지어주지. 너무 헷갈렸다!

  안그래도 헷갈리는데, 민음사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번역까지 잘못 되어 있다. 민음사의 폭풍의 언덕 p.57 을 보면 캐서린 린튼의 이종사촌이 헤어튼 도련님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난 힌들리 언쇼랑 프랜시스가 서로 부부 사이가 아니고 프랜시스가 힌들리 엄마의 자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캐서린은 왜 이모한테 언니라고 불러? 이런 생각도 하고 아무리 읽어도 등장인물 관계를 모르겠어서 초반에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헤어튼 언쇼는 캐서린 린튼의 외삼촌의 아들이니까 이종사촌이 아니라 외사촌이 맞는 건데, 책에 잘못 번역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읽은 책은 헌 책으로 산거라 오래전 출판된 버전인데, 개정된 버전에는 제대로 번역되어 있겠지?


  또 한가지 궁금한 게 헤어튼이 캐서린 린튼의 외사촌이면 둘이 4촌 밖에 안되는 어마어마하게 가까운 친척인데, 옛날 잉글랜드에서는 이 정도로 가까운 친척이 사랑하고 결혼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걸까?

  토마스 하디가 쓴 '무명의 주드' 를 보면 주드가 사촌인 '수'와 결혼하는 건 사회적으로 금기시 된다고 나온다. (읽진 않았지만, 영화 때문에 대략적인 이야기만 앎) 토마스 하디와 에밀리 브론테의 출생년도가 불과 22년 밖에 차이 안나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어떤 이유로 잉글랜드에서 사촌 사이의 결혼을 금지시킨 건지 궁금해 죽겠는데 찾기 귀찮아서 그냥 궁금해하고만 있다.


P.S 주말에 영화 '미녀와 야수' 를 봤는데 거기 야수로 나온 배우 '댄 스티븐슨' 이 아무리 생각해도 에드거 린튼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