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8.04 설국열차를 보고. 4

설국열차를 보고.

위로 2013. 8. 4. 18:41

* 스포일러 포함.

 

대한민국 영화 팬 중에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안 기다린 사람이 있을까? 평소 봉준호 감독이 헐리우드 영화 감독들에 비해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나 역시 무지무지 기다렸다. 설국열차를.

일단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계급간 투쟁, 은유 이런 어려운 영화의 메세지를 생각하지 않고서도, 설국열차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평들을 보니 지루했다는 평도 있던데 아니 어떻게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다들 허무했다고 말하는 마지막 결론도, 나는 오히려 마지막 때문에 좋았던 쪽이다.

커티스는 윌포드의 달콤한 유혹에 끝끝내 넘어가지 않았다는 게 제일 맘에 든다.

 

단 아쉬운 점이라면,

1. "봉준호였기 때문에" 희대의 대작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

2. 총이 등장하면서 부터 급속하게 느슨해지는 액션신과 스토리. 또 거기서 왜 갑자기 총이 등장하지? 개연성 부족이 아쉽다.

3. 남궁민수는 송강호가 하지 않아도 됐다. 결정적으로 그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남궁민수여야만 한다는 것 자체도 크게 부각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이 캐릭터의 설득력 부족은 설국열차의 가장 큰 문제점이기도 한데,

에드가(제이미 벨) 나 메이슨 (틸다 스윈튼) 윌포드 진영의 사람들 (비서와 스파칸에서 격렬히 싸우는 아저씨), 윌포드(에드 헤리스) 등등 극 내 캐릭터들이 왜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윌포드를 따르는지, 윌포드는 왜 열차를 설계 하여야만 했는지 메이슨은 왜 권력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많이 부족하다. 아마 이 부분이 제대로 됐으면 희대의 명작이 되었겠지. 그래도 주인공 커티스 캐릭터는 매력적이고 설득이 되는 캐릭터.커티스가 영화를 살렸다!

(P.S 이런 걸 볼 때마다 매그놀리아가 왜 대단한 영화인지 새삼 깨닫게 됨.)

4. 주인공 커티스에게 종종 배달되는 총알편지는 극과 거의 아무런 관련도 의미가 없다. 아예 빼도 무방하다 할 정도.

5. 너무 많은 스토리가 극 중 대사로 구술만 된다.

6. 잔인한 장면이 있다. 이건 단지 내가 잔인한 장면을 워낙 엄청 심하게 싫어하기 때문에... 근데 이 잔인한 장면이 극 중에서 필요해서 사용됐기 때문에 단점이라고 보기엔 좀 뭐하다. 그냥 이건 나한테만 단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볼만한 이유는

1. 기억에 강하게 남는 액션신 :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왜 액션영화를 보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고 사람간의 치고 받는 액션신에 야릇한 쾌감같은 걸 느꼈다.

특히 깜깜한 기차칸에서 횃불과 함께 벌어지는 액션신은 최고! Chen, We need the fire!! 라는 외침과 함께 횃불이 배달되고, 횃불을 한 손에 들고 서로 뒤엉켜 싸우는 장면은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긴 열차가 다리를 돌면서 서로 마주보게 될 때 커티스와 상대편 간의 총격신의 긴장도 상당하다. 볼만한 장면.

2. 주인공은 모두를 구원하지 못한다. : 이게 가장 헐리우드와 차별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배트맨에서 레이첼이 죽는 것 처럼 아주 가끔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그와 관계된 인물은 절대적으로 어떻게서든 살아남는데 반해, 설국열차의 커티스는 거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에드가를 살릴 것이냐 메이슨을 잡을 것이냐 하는 장면에서도 아마 헐리우드 같았으면 설국열차와 같은 연출은 절대 나오지 않았으리라. 

3. 하얗게 얼어붙어 멸망해버린 세상을 멈추지 않는 열차가 달리는 것 자체로 매력적인 화면.

4. 위에도 말했지만, 난 기존의 질서와 체제 내에서의 안락을 추구하지 않고, 아예 다른 세상을 모색하는 설국열차의 결말이 (또, 그런 전혀 다른 세계에서도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긍정이) 마음에 들었다.

5. 아무리 기대보다 별로여도, 대한민국 영화사에 한 줄 정도는 남길 영화임에는 틀림 없다.

 

어벤져스에서 샌님 같았던 크리스 에반스가 다소 소심한 34살의 꼬리칸의 리더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였고, 틸다 스윈튼 역시 약간 오바스러운 면이 있지만,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제이미 벨도 역할에 딱 어울린다.

 

설국열차 보기 전에 여러 영화 평론가들의 평을 읽고 갔다. 대부분이 봉준호 영화 치곤 별로다. 였기 때문에 난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아마 이렇게 좋은 느낌을 간직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누가 본다고 한다면 나는 추천하겠다. 그리고 나랑 설국열차 얘기 같이 하자고 할 것 같다.

난 어벤져스도 아이언맨3도 엄청 재밌게 봤지만, 솔직히 그 두 영화 본 후 이야기할 거리는 거의 없지 않은가?

설국열차는 만약 영화를 본 사람이 있다면 한 30분 이상은 영화 얘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다. 만약 내가 별점을 준다면 5개중 4개.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고 간다면 아마 제대로 실망할 그런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