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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사건

일상 2015. 7. 27. 00:52

정규직으로 처음 일하게 된 날의 아침을 아직도 기억한다. 2007년 7월 23일. 첫날부터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저녁 7시쯤 서울역에서 전철을 기다릴 때 숨이 턱턱 막히던 습하고 더웠던 공기.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과연 제대로 된 길일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고, 엄청나게 피곤했다.

 

2015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또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저번 포스팅에서 말한 2년치 메신저 대화기록을 통째로 넘긴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같은 팀에서 이유도 없이 윗사람 유세를 하며 틈만나면 나를 가르치려 들던 대리였다.

팀원들의 대화기록을 보려고 한 부장도 미친 것 같고, 너한테는 피해 안가게 할테니까 기록 전체를 넘기라고 한 부장의 말에 신나서 2년치 대화기록을 그대로 USB 에 다 담아서 넘긴 대리도 제 정신은 아닌 것 같다. 나랑 다른 팀원 짤릴 생각에 룰루랄라 회사 다녔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난다. 하하하.

당연하게도 USB 기록을 넘긴 대리도 권고사직 됐다. 부장의 말을 믿다니... 5년 넘게 부장을 봐놓고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는지. 참 그 대리도 대책없다. 멍청한건지 순진한건지.

 

내 죄라고 한다면 그 기록을 넘긴 대리와 대화를 한 것인데, 같은 팀인데 대화를 안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대화방에는 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한 그 정도 지적에 권고사직까지 주는 이런 회사를 어떻게 내가 더 다닐 수 있을 것이며, 막판에 회사가 나한테 대하는 꼬리지를 보니 내가 3년 동안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쓸데없이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차피 오만정 떨어진 상태라 애초에 관둔다고 했고 회사에서는 선심쓰듯 그럼 너는 권고사직 처리를 안해주겠다고 하며 위로금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줬다. 나랑 제일 친했던 대리님은 권고사직 상태로 사직처리 되고, 기록을 넘긴 대리는 본인이 순순히 기록을 다 넘긴 주제에 회사 상태로 고소장을 접수하겠다고 하고 있다.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같은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내 운명이라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로 떠도는 운명이겠지.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쭉.

 

원래 3년 전에 아무데도 취업 안되면 하려고 했던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교수들 성격에 질려 다신 가기 싫었던 모교에서 다시 일하게 됐고, 내일은 대학원 면접을 보게 됐다. 앞으로 원래 벌던 돈보다 현저히 적은 돈으로 공부까지 해야 하는데, 절묘하게 회사를 관두는 시기에 딱 맞춰 대학교에서 혹시 다시 와서 일할 수 있냐고 연락이 왔고, 또 내가 관두는 시기에 맞춰서 대학원 추가 모집을 시작한 걸 보면 참 이렇게 딱딱 앞날이 정해지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난 이렇게 될 운명이었고, 힘들게 맞지도 않는 회사에서 발버둥치지 말고 그냥 이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날 맡기기로 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 내막을 이야기 했더니,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보고 배우는 법인데, 보고 배우기 전에 그 회사 탈출하길 잘한 것 같다고 했다. 이상하게 이 말이 참 위로가 됐다. 변할 수 없는 성격이라 결국 그 조직을 내가 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성격이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에 맞춰 변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7월 20일부터 대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방학이라 사람도 없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초침 가는 소리만 들리고,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오래된 낡은 건물에서 박정희 시대때나 사용했을 법한 오래된 사무용 가구에 둘러 쌓여서 사람의 일은 쉽게 장담할 수 없다는 진리를 곱씹고 있다.

 

어제는 마지막으로 회사에 가서 3년 간의 내 짐을 빼왔다.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앞으로는 이 길도 이제 안녕이다. 생각하니 좀 슬펐다. 회사는 싫지만 그 고속도로는 좋아했다. 자유로에서 퇴근길에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이젠 안녕이다.

 

정말 이 길이 내 길이라면 아무 준비도 없이 임하는 내일 대학원 면접에서 말도 술술 나오고, 또 합격도 하겠지? 안되도 뭐 크게 낙담하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