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우스갯 소리로 어떤 선배가 야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지금이 최고 잘 사는거야. 우리가 언제 중국보다 잘 살았던 적이 있었냐?’ 라고 말했는데 예전부터 아시아 초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이 지금은 심심치 않게 어이 없는 나라가 되고 있다. 요즘 보면 일본보다 중국이 더 싫다는 한국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인터넷 에서도 심심치 않게 노골적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렇고. 사실 나도 밑에 사진 보고 엄청 웃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어찌되었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중국을 무조건 비웃을 수 없는 이유는 역사 보다는 어렸을 적 좋아했던 중국 영화들 때문이다. 내가 지겹도록 잔상에 시달렸던 영화도, 세상에서 최고로 슬프다고 생각했던 영화도 거의 중국산이니 말이다. ‘왜 우리나라는 저런 영화 흉내도 못 내는 거냐.’ 라고 불평을 한 적도 여러 번. 거기에 중국이 그냥 그 중국 본토만 중국이 아니라 홍콩도 중국이고 대만도 알고 보면 중국의 뿌리고. 그 동네 출신의 세계적 감독이 도대체 몇 명이냔 말이다. (인구가 많으니 당연하다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얘기가 길어졌지만, 내가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루쉰때문이다. 생일선물로 받아서 다시 한번 읽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원제:조화석습 朝花夕拾)는 내가 가장 여리고 외로웠던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똥통 중에 똥통이었던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진짜 선생님 같았던)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은 책이었다. 그 선생님은 이런 책이 나중에 논술 같은 거에 도움 되는 책이라면서 주셨는데, 뭐 나는 논술 보는 일류대학은 원서도 쓰지 못하는 성적이었는데. 으흐흐 (근데 그 해 서울대 논술에 아큐정전이 지문으로 나왔으니 그 선생님 약간은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건가??)

 

요즘에는 좀 덜하지만 난 원래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책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데 선수였다.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그만큼 그 책이 좋았다는 건데,

다시 읽었는데 별로면, 아 내가 왜 이런 책을 좋아했었지. 유치했구나. 하는데 한편으론 내가 좀 그래도 컸구나. 하면서 뿌듯하고. 다시 읽었음에도 좋으면. 아 역시 좋구나. 라면서 왠지 배신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 좋고 그런다.

 

다시 읽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는 날 배신하지 않는 쪽이었다. 중국 역사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아는 바가 있음 훨씬 더 심도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나같이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루쉰이 이야기 하고 있는 그 당시 중국의 상황과 문제점이 현재 우리나라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읽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또한, ‘루쉰자체가 너무 멋있어 주시니까. 딱히 별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냥 그 자체로 너무 멋있으신 분이다.

신문을 파는 소년이 전차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나, 베이징에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물의 속성을 모르면 함부로 물에 뛰어들지 말라고 말하는 (이런 세심한 것까지!) 모습이나, 대단한 혁명가라면 한 두 사람 쯤의 희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도저히 사람이 죽는 것에 초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습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도 아니고 직접 혁명의 한 가운데서 싸운 게릴라도 아니지만, 인간미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하나. (뭐 이리 거창해 진다냐) 너무 대단해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기 보다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아버지 같다고 해야 하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셔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의 초반부를 읽다 보면

중국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인 거 아닌가. 이렇게 중국 고유의 전통까지 비판해야 하나. 너무 서양문물만 우선시 하는 거 아닐까? 등등의 의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뒤로 갈수록 루쉰이 그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므로)

 

지금 내 상황이 회사 내부 사정과 결부되어 있어서 블로그에 구구절절하게 써놓을 수는 없지만 대충 뭉뚱거려 표현하자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어쩌면 혹시 될지도 모르니까 난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겠소.’ 이 상태랄까? 그래서인지 이 책이 큰 위로가 되었다. ‘희망이라는 메시지 때문에. 요즘 위에 말한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포기하는 단계이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에 이 책에 대한 것을 다 쓰면 내 블로그 역사상 최고로 긴 포스팅이 될 듯 하여 두 개로 나누어야겠다. 다음 페이지는 루쉰 소개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좋았던 구절 모음. 회사에서 하라는 일은 안하고 시간 날 때 이런 거나 쳤다. ; (그 때문에 이제서야 책 정리가 끝났지만)

 

P.S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의 원제인 조화석습 ( 朝花夕拾)’ 이란.

: 아침에 떨어진 꽃을 바로 쓸어내지 않고 해가 진 다음에 치운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더 해석하자면 떨어진 꽃에서도 꽃의 아름다움과 꽃의 향기를 취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멋있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 루쉰 산문집

이욱연 편역
예문








루쉰
魯迅 : 1881~1936
: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작가, 문학사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련(周樹人)이다. 일본 유학 시절 의학을 공부하다가 병든 육체보다 중국인들의 병든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소개글은 책에 써 있는 건데, 이 부분 좀 오바다. 꼭 이렇게 까지 써야하나? ;;) 문학으로 전환한다. 봉건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일생을 중국 현실의 변혁을 위해 살았다. 새로운 역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위해 중국의 문명과 중국 현실을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하는 한편, 봉건주의와 근대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시각을 지닌 문명비판을 전개하였다. 그런 글들은 잡문(雜文)’ 혹은 잡감(雜感)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조하였고, 20여권의 산문집으로 묶었다. 또한 <광인일기(狂人日記)> (1918)를 시작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고향(故鄕)>(1921), <아큐정전(Q正傳)>(1921), 등을 발표하였고, 그의 소설은 <<외침吶喊>>(1923), <<방황(彷徨>>(1926), <<고사신편(故事新編)>>(1936), 등의 소설집에 실렸다. 루쉰은 중국 근현대인들에게 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이래 우리 현실을 읽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러두기.

1.     저본으로  <<魯迅全集>>(人民文學出版社, 1981)을 사용하였다.

2.     출처 표기중 <>은 글의 원제목이고, << >>은 그 글이 실린 책의 제목이며, 숫자는 <<魯迅全集>>의 권수와 페이지, 그리고 발표된 연도순이다.

3.     각 글의 제목은 되도록 원제목을 그대로 따랐고, 제목이 없는 글에 제목을 달거나 불가피하게 제목을 바꾼 경우, 출처에 원제라고 명시하였다.



제 1 부.  길은 영원히 있다.



제 3 부. 외침, 그리고 반항.



P. S 위에 올려놓은 글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글 두편임.
숨어 있는 글을 펼치면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겠지만, 내가 워드 파일로 작성한 건 더 길다. 작성도 아니고 배껴놓은 것이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심심하시다면 첨부파일을 다운 받아서 술술 읽어보셔도 무방 하겠지만, 무식하게 이걸 다 손수 쳤느냐는 말을 들을까봐 살짝 두렵다. 책 어디에도 무단복제 금한단 말이 없어서 저지른 짓이다. (단, 빨리 쳤기 때문에 오타가 있을 수 있고 책임지지 않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