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사람들
국내도서
저자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 / 윤우섭역
출판 : 열린책들 200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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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4일 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 은 나를 지배했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재밌어서 출퇴근 시간, 잠들기 전, 심지어 (사장님께는 좀 죄송하지만) 회사 근무 시간에도 몰래몰래 책을 읽었다. 구입할 당시 재밌을 거라 생각한 책은 아니었는데, 이 책이 올해 읽은 책 중 최고 재밌는 책 중 한 권이 될 줄이야!


  이 소설은 25살의 젊은 소설가였던 나 '이반 뻬드로비치' 가 군병원 침대에 누워 작년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곧 죽는다면, 이 회상기를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할 수도 있겠지?
  내 일생에 있어 매우 어려웠던 지난해가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생각난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것을 쓰고 싶고, 만일 내가 이 일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따분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지나간 감정들이 이따금 나를 아프고 괴롭도록 흔들어 놓는다. 붓 아래서 그것들은 더 조용하고, 더 조화된 성격을 가질 것이며, 그럴 수록 잠꼬대나 불안한 꿈 같은 느낌은 덜해질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여긴다. 글쓰기의 기계적인 활동은 이미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냉정해지도록 만들며, 나의 내부에서 과거의 작가적 습관을 일깨우고 나의 회상과 병적인 몽환을 일, 즉 작업으로서 변환시켜 놓는다…….
-p.26


   소설의 화자인 이반은 '가난한 사람들' 데뷔했던 청년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와 닮은 인물이고그렇다 보니 위에서 발췌한 부분처럼 실제 도스토예프스키를 엿볼  있는 부분이 소설에  많이 나온다. 난 훌륭한 소설을 쓰는 것이 꿈인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반과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둘 다 너무나 좋았다.


 
'상처받은 사람들  시기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고된 수용소 생활과 군역을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뻬제르부르그에 복귀한 때라고 하니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군역  간질로 병상에 누워있던 때를 반영했으리라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젠가는 뭔가를  쓰겠다는 신념으로 수용소와 군대에서의 모진 세월을 견뎠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치열하게 소설가이기를 원했던 사람을 어찌 싫어할  있을까.

 
내가 사랑한 인물 넬리에 대해 쓰기 위해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소설가로 성공적으로 데뷔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반은 뻬제르부르그에서 방세가 저렴한 방을 찾아다니다 스미트라는 기분 나쁜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다이반은 스미트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그가 살던 방에 방문하는데  방이 글쓰기에 적당하고 방세도 저렴하여 자기가 사용하기로 한다. 방에서 글을 쓰던 어느 날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다소 이국적 분위기의 13살쯤  소녀 넬리(엘레나)가 스미트를 찾아오고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그녀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한편 일찍 부모님을 여읜 이반을 친부모님처럼 키워준 양아버지 이흐메네프(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그의 아내 안나 안드로예브나는 홀아비 공작 발꼬프스키(뾰뜨르 알렉산드로비치) 넓은 영지를 성실하게 관리해줬지만, 악랄한 발꼬프스키 공작은 이흐메네프에게 있지도 않은 횡령 혐의를 씌워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결국 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자 이반의 유일한 사랑 나따샤와 함께 영지를 떠나 뻬제르부르그로 이주하고, 이반은 나따샤와 약혼한다. 하지만 이반의 기쁨도 잠시, 나따샤는 발꼬프스키의 아들 알료샤와 사랑에 빠지고부모님과 이반 모두를 배신하고 알료샤와 함께 야반도주를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든 세상 속에서 인물들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서로 질투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화해하고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지만 전혀 어려운 소설은 아니다.   소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 걸작은 아닌지   같긴 하다나부터도 넬리와 이반 나오는 (chapter)  읽기 위해 다른 장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아니 매력을 못 느꼈다기보다는 넬리 외 다른 인물들이 다 미웠다. 심지어 착하디착한 이반도 가끔 꿀밤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 밉상으로 보인 이유는 내가 넬리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넬리는 겨우 13살 밖에 안됐지만 자기를 구해준 이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 사랑은 존경, 우애 같은 성격의 사랑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사랑 바로 그것이다. 사실 넬리는 이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넬리에게 이반은 아빠이자 엄마, 그리고 친오빠, 친구 그리고 애인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은 중고시장에 가서 넬리 옷도 사주고 아프면 의사도 불러주는 등 정성을 다해 넬리를 돌보지만, 이반이 넬리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동정과 연민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오로지 단 한 명, 나따샤뿐이니까 말이다.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나따샤지만 이반은 끝내 나따샤를 사랑하며 그녀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이렇게 바보 천치 같은 이반이 어찌나 야속하든지.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사랑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날 아침 내내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았고, 쾌활하고 상냥하게 보였다. 동시에 그녀에겐 뭔가 부끄러운, 심지어 소심한 태도까지 깃들어 있었다. (중략)

「저는, 저는 당신이 계시지 않을 때 당신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부드러우면서 꿰뚫는 듯한 시선을 나에게 향하고는 온통 얼굴을 붉혔다.

「아, 그래! 맘에 드니?」 나는 면전에서 칭찬받는 작가의 당황함을 느꼈지만, 내가 이 순간 그녀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불가능했다. 넬리는 잠시 침묵했다.

-p.304-305


  내가 이 부분을 발췌한 이유는 읽으면서 이반이 넬리에게 입을 맞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에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인데, 이건 나한테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읽는 소시민이고, 이 세상에는 몇 개 책을 제외해도 좋은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이야기는 꼭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에 있어선 편협한 내가 24살의 장성한 이반이 넬리에게 입을 맞추지 않아 읽으면서 화가 날 지경이라니?! 편협한 내가 24살의 장성한 이반이 넬리에게 입을 맞추지 않아 읽으면서 화가 날 지경이라니?! 그만큼 이 넬리라는 인물의 호소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이 인물을 창조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그렇게 흉악하게  생긴 양반이 (미안합니다. 도선생님...) 누군가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13살 소녀의 마음을 참으로 잘 묘사해 놓으셨다.


  비련한 소녀 넬리 외에도 인물의 심리를 행동으로 형상화한 부분에도 여러 번 감탄했다. 특히, 소설 초반에 도망간 딸 나따샤를 없는 자식 취급하면서도 남몰래 그리워하는 이흐메네프가 어린 나따샤가 새겨진 메달을 발로 마구 밟다가 흠칫 놀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메달에 미친 듯 입 맞추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에서는 이흐메네프의 터질듯한 감정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두 번이나 실패했던 터라, 그저 싼값에 중고책이 나왔다고 이 책을 샀다가 또 읽기에 실패하고 더불어 나한테 실망하는 것 아닌가 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참고로 대학시절 실패했던 책은 '악령' 과 '미성년'이다. 뭔 배짱으로 '악령' 을 읽으려고 했던 건지 나 원. 아직도 책꽂이에 고이 꽂혀있다...)

  이 책과 함께하는 며칠 동안 진심으로 즐거웠다. 다 읽은 게 아쉬울 정도로.


P.S 1.

이 소설은 악당 발꼬프스키 빼곤 완전히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인데, 딱 두 군데 조금 웃긴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돈이라곤 벌어본 적 없는 알료샤가 이반에게 앞으로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볼까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의 말을 들은 이반이 '너 까짓 게 소설을 써?'라는 생각에 황당해 하는 부분 좀 웃기고, 두 번째는 아래 부분인데,


그 속에는 최근에 나온 나의 소설에 관해서도 두어 마디 씌어 있었다.

  들여다보니 <통신원>이란 논문이었다. 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칭찬하는 글도 아니어서 나는 대단히 만족했다. 그렇긴 하지만 <통신원>은 나의 글에서 전반적으로 <땀 냄새가 난다> 고 말하고 있었다. 즉 내가 땀이 나도록 온 힘을 기울여 글을 쓰며, 정교하게 그 글을 다듬고 마무리 손질을 가하기 때문에 싫증이 날 정도라는 것이었다.

  출판업자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에게 지난번 소설은 이틀 밤 만에 썼고, 이번에는 이틀 낮과 밤 동안에 인쇄지 세 장 반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p. 497

: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는 소설 이틀 만에 썼는데도 이런 말 듣는다고 소설 속에서 이반을 통해 잘난 척하고 평론가들 비웃는 것 같아서 좀 웃겼다. ㅋ (근데 진짜로 이틀 만에 썼을 것 같음)


P.S 2. 내가 산 책은 2003년에 출판된 중고책으로 한 권으로 된 책이다. 따라서 표기한 페이지도 현재 판매되는 (상), (하) 로 나누어진 책과는 좀 다를 것이다.


P.S 3. 혹시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맨 앞장 등장인물 소개 절대 보지 말고 바로 읽길 권하고 싶다. 내가 그것만 안 읽었어도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뭔가 억울해!



이제서 새삼스럽게 올리기 좀 민망하지만 일본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우리가족은 그래도 명절인데 어디 가야하지 않겠냐 싶어서 예술의 전당에 갔다.

우리 친척들은(특히 친가) 명절이 되어도 가족들끼리 복작보작 모이거나 몇시간을 걸려서라도 귀향 하는 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들 성격이 비슷비슷해서 꺼려하는 분위기랄까? 혹시 만나도 딱 점심한끼 같이 하고 말지 그 집에서 자고 먹을 것 해먹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명절증후군도 없고 우리가족 역시 명절 연휴는 연휴 내내 늘어지게 잠자고 쉬고 그러는거다. 그렇다고 친척들이랑 원수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성격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 엄마는 처음에 이런 게 다들 너무 차갑게들 지내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 했다는데, 솔직히 난 이게 훨씬 합리적이고 좋다고 생각한다. 20년 넘게 이런 집안 문화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친척들이 다 둘러앉아서 음식하고 TV 보고 얘기하고 하는게 왠지 끔찍하고 싫다. 얼마나 불편해.;;

우리가 갔던 날 예술의 전당에서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칸딘스키라. 전시회 제목만 보면 칸딘스키 그림이 엄청 많을 것 같지만 그냥 러시아 거장전 이라고 하는 게 나을 뻔 했다. 다른 작가들 그림이 훨씬 많았다.

생전 처음 보는 러시아 그림을 보니 러시아에 한번 가고 싶어졌다. 여러 작가들이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렸음에도 모든 그림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음침한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고흐 그림처럼 태양이 작열하는 느낌이 나는 그림은 거의 없었다. 여름을 그리고 아무리 화려한 색을 썼어도 약간 어두워 보였다. 단순한 난 러시아 춥긴 진짜 추운가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저번에 미국애들이 러시아를 도저히 눈뜨고는 못봐줄 정도로 싫어하는 이유는 러시아한테 문화적 열등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작가로만 봐도 그렇다. 톨스토이, 푸쉬킨,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안톤 체홉♡ 을 비롯한 러시아의 쟁쟁한 작가들과 비교해본다면 솔직히 뼈속까지 미국인이라 할 수 있는 굉장한 작가가 누가 있나. (그리고 미국애들은 '백경'을 굉장한 문학작품으로 포장하던데 난 읽으려다 너무 재미 없어서 포기했다) 음악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영화의 이해 같은 입문서를 펼쳐보면 러시아 감독이 많으니까. 거깃다 나 역시 러시아 하면 왠지 닥터 지바고 생각나고 왠지 낭만적일 거 같고 그런데 미국 하면 과장하기 좋아하는 놈들. 깊이 없는 놈들. 심지어 뿌리 없는 놈들. 이런 생각만 든단 말이다. (인디안이나 흑인 각 민족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볼 때)
아 미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국 애들이 스타워즈에 죽고 못사는 것은 미국인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미국만의 설화나 이야기가 없고 그 자리를 스타워즈가 대체해서라는 주장도 어디서 봤다. 미국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그들만의 특이한 정서가 없기 때문아닐까? 또한 난 미국이 그렇게 죽고못사는 스타워즈도 재미가 하나도 없던데. 돈주고 보라고 그래도 시간 아까워서 보기 싫을 정도.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러시아의 정서가 고스란히 그림에 담겨져 있는 것 같아 신기했다.
내가 가장 좋았던 그림은 바로 밑의 그림인데 이미 몇가지 색을 안 썼고 형태도 매우 간결하지만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허해지고 쓸쓸하고 그랬다. 그래서 엽서도 샀는데 불행히도 난 작가이름도 그림이름도 벌써 기억이 안난다. 집에서 블로그 하게 되면 작가명하고 이름도 붙여 놓겠다.;;겨울과 관련된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이 죽일놈의 아이큐)
그 전시장에서 봤던 인상적인 문구 는 (정확하진 않지만) '나쁜 평화가 뜻있는 전쟁보다 항상 낫다.'(러시아 속담) 라는 문구다. 전쟁 그림 위에 붙여져 있던 문구인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혹시 더 궁금하시다면 http://www.2007kandinsky.com 을 방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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