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대한민국의 남쪽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라도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그렇게 학교가 생겨먹은건지 모르지만 복도 쪽 창문이 이층창문이었다. 윗 쪽에 여는 창문이 하나 있고 발 쪽에 여는 창문이 하나 더 있었다. 바깥쪽 창문 열고, 윗층창문, 아래층 그러니까 내 발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열고 창문까지 다 열면 여름에는 환기가 씽씽 됐다.(발 쪽에 있어서 발로 창문을 여닫는 것도 가능) 하지만 문제는 그 아랫층 창문 때문에 겨울에도 교실로 바람이 씽씽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문을 닫아도 그 아랫쪽 창문을 통하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내 발은 항상 차가웠다. (내가 보낸 3번의 겨울 중 한번은 동상도 걸렸었는데..) 
털실내화를 신어도 보온이 안되고 차가운 내 발이 보냉이 될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괴로운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다소 더운 지금 사무실의 실내온도에 감사할 따름이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교복만 입고 지내서 사복을 살 일이 없지만 그때 당시 라디오가든이라는 곳에서 도톰한 빨간초록 섞인 체크 남방을 세일 안할 때 좀 비싸게 주고 샀었다. 난 그 남방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고등학교시절 대학시절 내내 그 남방을 입는 철만 되면 빨아서 마르기가 무섭게 그 남방을 입었다.
추운 교실에서 교복안에 입을 니트 가디건을 사서도 무지하게 입었는데 그 니트가디건은 얇은데 모자까지 달려서 교복안에 입기 딱이었다. 그 가디건 역시 입는 철만 되면 거의 3일걸러 한번씩 입는 옷이었다. 
그 가디건은 예전 서울 회사에서도 사무실에 놓고 입는 가디건이었는데 오늘 춥다고 해서 남방이랑 가디건을 세트로 입고 그 위에 오리털잠바를 입고 가디건 모자 쓰고 오리털잠바에 달린 모자를 이중으로 쓰고 길을 걷다보니 왠지 "진정한 나" 가 된거마냥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했다. 소매가 조금 닳고 가디건은 엄마가 너무 낡았으니까 입지 말라고 말릴 때도 있지만, 나는 이 옷을 시집가서 애 낳은 뒤에도 입을 작정이다.


그나마 공채하는 곳에 원서를 내려고 중부교육청까지 가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떼어왔다. 몇년만에 보는 생활기록부인지. 신기했다. 종이 몇장으로 내 과거를 마주대하다니.  내 생활기록부의 몇몇 기록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출결상황
- 3년 내내 개근. 흐흐흐. 고등학교 때 난 꽤 착실했다. (그리고 꽤 건강했나보다) 지각은 많이 했지만.

2. 신체발달상황
- 키는 3년 동안 0.5 cm 밖에 안자랐고, 체력급수는1학년, 2학년 3학년 각각 1급 2급 1급. 이거 누가 보면 완전 체육소녀인줄 알겠지만, 중학교 때는 4급 4급 5급 이었는데 전라북도의 체력급수 기준은 불구가 아닌이상은 2급 받을 수 있나보다. 나 50미터 9초에 뛰고, 다리 밑으로 손 내리기는 9cm (만점은 20cm 넘었음)로 반 전체에서 꼴찌에서 2등하고 윗몸일으키기는 야매로 만점 맞았는데. 아 오래달리기는 선생님이 날 다른 반 애로 착각해서 1바퀴 덜 달린 적도 있었다. 거의 걸어서 들어왔는데.. 아 나는 세상에서 오래달리기를 최고로 싫어했었지. 이때 전학와선 초등학교 때 부터 생전 못받아보던 체력장 1급을 받았다. 전학가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군.

3. 수상경력
- 해당사항 없음. 크크크

4. 진로지도상황
- 특기 또는 흥미는 독서, 음악감상, 독서. 1학년때 장래희망은 영화평론가 라고 써 있다. 풋. 2학년 3학년은 진짜 부끄럽지만 연구원이랜다. 우리 엄마 아빠의 진로희망은 3년 내내 공무원.

5. 특별활동상황
- 1학년 : 배드민턴반, 2학년 : 수학반, 3학년 : 현대문학반. 전혀 일관성이 없다. 그도 그럴것이 저기 있는 클럽활동부서는 클럽활동 시간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허송세월 보내기로 유명한 선생님 쫓아서 들어간거다. 클럽활동 들어가선 그냥 몇시간 내내 친구랑 놀다왔음. 배드민턴반 옆에는 나보고 서브능력이 뛰어나다고 써있다. 푸하하하. 배드민턴반 가서 배드민턴 친건 아마 3번도 안될 걸.

6. 단체활동
- 난 전학가는 바람에 1학년때도 극기훈련 받고, 2학년때도 극기훈련 받아야 했는데 2학년 때는 지리산 가기 싫어서 그냥 안가고 학교에서 잡초 뽑았다. 갔다온 애들 말 들어보니 천만번 잘한 일이었다. 오전동안만 잡초 뽑고 오후에는 더워서 교실에서 비디오보고.. 캬. 천국이었지.

7. 행동발달상황
- 1학년 : 침착하며 끈기 있는 일처리를 함.
  2학년 : 언행이 바르고 신중하며 근면한 학생임.
  3학년 : 차분한 성격에 예의가 바르고 근면 성실하며 표정이 밝음.
  오~~ 언빌리버블!!!! 이런 평가가 나오다니.

8. 교과학습발달상황
- 1학년 1학기 : 미술하나만 수 맞고 다른 과목은 다 양 아니면 가의 평점. 이때 저번 블로그에도 썼지만 이모댁에서 한참 방황중이었다.
- 1학년 2학기 : 국어 성적 제일 좋음. 다행히 양하고 가는 없고 오 1학년 2학기때는 미도 없다. 1학년 2학기부터는 전라북도 학교 성적.
- 2학년 1학기 : 영어 성적 제일 좋음. 근데 난 2학년 때 부터 이과 였다는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2 성적 제일 안좋음.
- 2학년 2학기 : 우와 나 한문 전교 1등이었어!! 근데 난 요즘 신문 보면 한자 거의 못 읽는데..  고등학교 땐 하룻밤만에 한자 다 외우고 시험을 봄과 동시에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곤 했었다. 아 그때 좀 해놓을 걸. (한문 못하는 거 꽤 큰 컴플렉스임)
- 3학년 1학기 : 작문 성적 제일 좋음. 3학년 1학기 때부터는 선생들이 대학교에 수시입학시키려고 점수 막 퍼주는 바람에 평어도 제일 좋다.
- 3학년 2학기 : 역시 작문 성적 제일 좋음. 1급 2급 1급의 체력급수에도 불구하고 체육은 거의 전교 꼴찌권. (실기평가 항상 최하점 맞았고, 체육시간에도 실내 체육관에서 누워자기 일쑤였다. 뭐 더 중요한 건 지독한 몸치이기도 하고)

이번 생활기록부 때문에 날짜까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난 1999년 7월 13일에 전라북도로 이사왔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엄마가 와선 전학 절차 끝냈다고 말씀하시는 거다. 나는 애들한테 인사한마디 못하고 쉬는 시간에 짐챙겨서 교복 입은 채로 낯선 곳으로 왔다. 쉬는 시간에 사물함 정리하는 나를 보며 너 어디가냐고 묻길래. 나 전학간다고 했더니 애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뭔 말 하냐고 하다가 내가 빌렸던 물건을 주인한테 다 되돌려주고 신발도 안신고 그냥 슬리퍼 신은 채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니까 그때서 진짜냐고 하면서 몇몇은 고맙게도 눈물까지 글썽거려줬다. 학교를 나올 때만 해도 안 울었는데 그런 날 보고 우리 엄만 우셨다.  아빠 차를 타고선 5개월 밖에 못다녔던 학교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다니고 싶은 학교였다. 14지망 중에 1지망에 쓴 고등학교 였다. (그때 당시 인천의 고등학교 입학 시스템은 무식하게도 인천에 있는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해 들어가고 싶은 순위를 적어 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다) 운좋게도 1지망에 붙어서 좋아했던 학교였다. 중학교 친구들도 많았는데.. 난 중3때도 전학생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어렵게 친해진 친구들이었는데. 그걸 다 뒤로 하고 떠나려니 미칠 것만 같았다. 난 중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흰 교복 윗도리에 초코 아이스크림을 쏟았다. 다신 입을 수 없는 교복이었다. 그렇게 얼룩덜룩 한 교복을 입고 한 눈에도 탐탁치 않았던 새 학교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 혼자만 남색치마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난 아직도 1999년 7월 1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학교에 다녔지만 난 3년 내내 결국 그 학교에 적응을 못했던 것 같다. 빌어먹을 이력서 때문에 다시한번 감회가 새로워져버렸다. (아니 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내라고 하는거냐고) 내 고등학교 시절이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스쳐가는 것 같다. 제길. 안그래도 우울한데 말이다.

난 중3 3월 말에 대전에서 인천으로 전학왔다. 전학 수속 때문에 교육청에 갔던 때가 생각난다. 아빠가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더니 남녀공학으로 갈래 여중으로 갈래? 이러시길래 그냥 여중 갈래요. 이래서 나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아주 가까운 여중에 다니게 되었다.
대전과 인천은 정말 딴판인 도시다. 난 중3때 전학와서 고1 여름에 다시 전학을 갈 때까지 내내 인천에 전혀 적응을 못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낯선 시절이다. 앞으로는 그런 낯선 내 모습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다. 일부러 우울해지려고 노력했던 시기라고 하면 웃기지만 실상이 그랬다. 난 신체발달도 다른 애들이 비해 엄청 느렸고, 그 덕에 사춘기도 늦었는데 중3때가 되어서야 사춘기가 와버린거다.
그 시기에 전학은 날 정말 힘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멀쩡히 있다가 집에만 오면 자기 직전까지 울다 잠들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다시 학교가선 잠 많이 자서 부었나보다고 말하고 그냥 또 수업 잘듣고, 또 집에와선 울고. 동복입을 때 전학을 와선 하복 입을 때까지 나는 하루에 한번이상 안 울었던 날이 없다. 내 기분과는 반대로 성적은 수직 상승을 거듭했고, 대전에서는 오늘이 시험인지 아닌지도 모른채로 학교와선 다 찍고 그냥 엎드려 자고 100점 만점에 32점을 맞고 평균 60점 맞고 담배피고 술마시며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애들과 놀던 불량 청소년 생활을 인천에 와서는 완전히 청산했다. 32점 맞던 과목을 중3 땐 심심치 않게 100점도 맞았으니 성적면에 있어서는 인천으로의 전학이 꽤나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인간인 줄 알았고 공부 잘하는 게 굉장히 힘든 건 줄 알았는데 진득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하면 누구나 다 되는 게 공부구나. 혹은 아.. 뭐 내가 머리가 완전 꼴통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공부에 있어선 자신감도 얻었다. 하지만 난 친구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전학을 가서도 난 친구가 없었다. 그냥 친구들은 있었지만 단짝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때 단짝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없어본 자 만이 알 수 있다.
대학교에 와서 힘든 일도 많았고, 지금 직장 생활도 많이 힘들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로 우울했던 시기를 꼽아보라면 아직까지도 당연히 중3부터 고1까지 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전혀 치유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과거라 생각만 해도 진저리 칠 정도로 싫다. (이래서 발달 장애라는 것이 무서운 거다)
예전 홈페이지나 블로그에는 내 16살에서 17살 까지의 기억에 대해서 많이 썼는데, 예전에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나보다. 그 시기에 대해 쓰려면 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을 쓰고 난 후에는 또 그 때의 잔상에 시달려야만 한다.
복잡한 사정에 의해 나는 엄마와 헤어져 이모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미 난 다시 전학을 간다는 사실을 알고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이 고등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선생님한테 잘보이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내 성적은 다시 급하강을 거듭하여 전교등수는 약 300등 넘게 떨어졌다. 반등수로 30등이 떨어졌으니 말 다한거다. 이때문에 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에 평어는 거의 다 양 과 가 를 기록하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나 고등학교 때 양하고 가 하도 많아서 양갓집 규수였다고 농담 하지만, 그 때는 거의 인생 포기한 채로 살았다. 이모네 집에서 그냥 택시 타고 늦게만큼 학교오고 시험을 보든 말든 상관도 안했다. 우리 엄마아빠가 학교 선생한테 얘는 전학갈 애라고 말해놓은 터라 선생들도 내가 뭘하든 전혀 상관을 안했다.
중3때는 인천에서 계속 사는 줄 알고 그래도 친구들하고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공부도 하고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활달하려고 노력했던 애가 고등학교 오자마자 딴사람처럼 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도 계속 친구 해주는 애는 없었다. 애초에 중3때 전학와서 알고 지낸지 1년 밖에 안된 애한테 뭐하러 그렇게 해주겠나.

그런데 그 시기에 유일하게 내 곁에 있었던 친구가 있다. 그 당시에 나는 걔한테 단짝이 되지 못했다. 이미 그 친구도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친했던 단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중학교 때도,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못나게 구는 때에도 그나마 내 곁에 있으면서 편지 써주고 내 얘기 들어주는 사람은 선생도 이모도 이종사촌언니도 아닌 내친구 민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학창시절에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 알수 있다)
아직까지도 내 인생 최대의 컴플렉스로 남아있는 학창시절에 유일한 친구는 민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다시 전학을 가서는 헤어져 있었지만 우리 둘은 싸우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기도 하면서 대학교 때문에 내가 다시 올라오면서 만났다. 대학교 때 부터는 우리 둘은 단짝이 되었다. 집도 가까웠고, 20살이 넘은 우리는 의외로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전에는 민양이 길가다가 다리가 꼬여서 넘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니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 친구는 분명히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그대로 넘어졌을 거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둘은 서로의 행동에 대해 빤하니까.
오늘도 그 친구와 하루종일 같이 놀았다. 난 스탬프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친구에게 새로운 스탬프 세트를 선물했다. 연인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데 이런 걸 챙기는 게 참 우습지만, 오늘 이렇게 나름대로 선물도 주고 받고 사진도 찍고 고등학교때 자주 가던 부평역까지 가서 웃고 떠든 이유는 우리가 알게 된 지 10년이 되었다!!! 라면서 자축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이든 낯설어 지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보통 그 낯선 시기는 힘든 시기일 때랑 겹치는 것 같다. 최고의 활달함을 자랑하던 내친구 민양도 가장 친한친구인 나에게 조차 낯설어지는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행히 걔도 나도 그 낯선 시기는 다 넘겼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둘다 그 낯선 시기에도 곁에 있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내친구 민양에게 너무 감사하다. 16살 이후의 내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민양! 36살되어서도 같이 친구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