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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

일상 2016. 8. 20. 23:45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파서 그런지, 내 몸의 변화에 무척 민감하다. 아프기 직전의 느낌도 알고, 열이 날 때도 내 체온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맞는다.

아픈 것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나는 몸이 아플 것 같으면 만사 제쳐두고 쉰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무실에는 상비약이 언제나 완비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 잘 안다니던 사람은 필요이상으로 병에 민감한 나와는 달리 타이레놀 하나 먹는 것도 꺼리고, 병원도 웬만해선 잘 안가는 것 같다.

우리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아무리 병원에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아프면 약 먹으라고 해도 그렇게 완고하게 약을 드시지 않곤 했다.

재작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엄마는 올해 2월 쯤 돌보는 할머니 하나가 너무 증세가 심각하여, 그 할머니를 돌보고 집에오면 방광과 허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며 끙끙 앓았다. 나는 그렇게 아프면 일을 당장 그만두고, 가까운 기독병원 (우리동네에서 가장 예약이 쉬운 종합병원) 이라도 가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는 끝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그리고 올해 초여름부터 무리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 집만 돌봐도 힘든데, 세 집을 돌아다니며, 어쩔 때는 밤 10시에도 부르면 일을 가시곤 했다.
엄마가 쉬엄쉬엄 일을 하나만 해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살 수 있는데, 내가 그렇게 그만하라고 말려도 엄마는 뭐라도 홀린듯 그렇게 돈을 벌려고 기를 쓰고 일을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가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무리해서 일을 많이 한 건 다 동생의 전화 때문이었다. 6월달 어느 새벽에 성남에서 경찰이 전화를 했다. 난 통성명도 안하는 경찰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직도 그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경찰인지 아닌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여하튼 그 사람은 전화로 당신 아들이 지금 성남 길에서 누워서 자고 있으니 당장 와서 데려가라고 말했다.

엄마는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전혀 드시지 않는 분이었다고 한다. 엄마도 거의 술을 안드시고, 평생 취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엄마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아빠가 가끔 친구들과 술을 드시면 크게 화를 내시곤 했는데, 제일 아끼는 아들이 그렇게 증오하고 혐오해 마지 않는 술을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길에서 자고 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그날 밤 엄마는 밤새 속상해 하셨다.

사건 다음날 동생과 엄마가 전화를 하는 중에 엄마가 동생에게 왜 그랬냐 물어보니, 동생이 '요즘들어 내가 결혼하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동생이 결혼하기 힘들겠다고 한 건, 작년에 동생이 엄청 좋아해서 3개월 만에 얘랑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던 여자에게 차인 상처가 아직까지도 너무 크고, 걔만한 여자를 평생 못찾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다는 말이었을텐데, 언제나 돈에 열등감을 가진 엄마는 그걸 또 당신이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을 하셨던 거다.

엄마는 동생이 돈이 너무 없어서 결혼 못할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결혼할 때 동생에게 돈 천만원이라도 주려고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했다고 수술 다음 다음날 고백하셨다.

난소암 진단을 받기 한달 전부터 엄마는 열이 며칠동안 계속 나는데도 새벽6시 반부터 밤8시까지 미친듯이 일을 하셨다. 내가 화를 내며 그만하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들에게 천만원을 주겠단 엄마의 강한 의지를 꺽은 이는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었다.

10년 넘게 계속 다녔던 내과의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침대에 누워보라고 하신 뒤 배를 눌러보고 증세를 보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증세는 간단한 병이 아닌 것 같다고, 당장 인하대병원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외래 예약까지 해주셨다. 엄마는 거기서도 크게 아픈거 아닌데, 꼭 대학병원까지 가야하냐고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내과 선생님이 당장 가셔야 한다고 소견서까지 써주셨다.

그렇게 인하대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 끝에 결국 난소암 진단을 받았고, 대수술 후 이제 항암 1차를 마쳤다. 

20대에 6개월 넘게 엄마 병간호를 했던 경험이 있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는, 환자 외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프면 안되는게 병간호의 첫째 조건이라고 이 말 명심하고 안아프게 체력 관리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요즘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아빠와 내가 같이 하고 있지만, 집안일에 요령이 없는 우리 둘은 뭘 하나 해도 엄마처럼 빠르고 옳게 되질 않는다.

제일 힘든 건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거다. 자취할 때도 미역국 한번 안 끓였던 내가 반찬이나 국을 하며 출퇴근까지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요리책을 세권이나 샀는데, 책에 있는 간단한 재료도 결국엔 마트를 한 번은 가야하고, 마트에서 장보는 걸 싫어하던 내가 간신히 장을 보고 집으로 오면 벌써 어질어질 하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재료도 다듬어야 하고, 요리 한번 하면 설거지는 또 산더미처럼 나온다.

엄마는 이 모든 일을 이제까지 애 키우면서 일하면서 다 혼자 하셨다는건데, 엄마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맞벌이하는 여자들에게 무한한 경외감을 느낀다.

결국 익숙치 않은 생활에 나도 힘이 들었는지, 이번주 내내 미열이 났다. 체온이 참 신기하다. 1도만 높아도 사소한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참 힘이 든다. 열이 나는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는 집안일을 하려니 힘들었다. 엄마 외 아무도 아프면 안되는 게 간병의 첫번짼데, 벌써 첫번째부터 나는 글러 먹은 것이다. 이제서야 내 약한 체력이 후회스럽고, 운동 좀 해놓을걸..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엄마는 항암을 몇 차까지 할 지, 의사도 장담을 못하겠는 모양이다. 다만 3차 마다 검사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하셨는데, 제발 빠른 시일 내 차도가 있어서 길게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이 고되도 엄마를 보면서 내가 힘든 건 엄마의 100분의 1도 안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엄마 수술 부위에 붙어 있던 습식 드레싱을 제거했다. 거의 30cm 에 걸쳐 있는 무자비한 봉합 자국을 보고나니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아주 잠깐 아빠를 원망했다. 아빠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도 엄마에게 잘해드린 거 하나 없다. 엄마에게 일 그만하라고 화 내기 전에 차라리 그냥 내가 모은 돈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할걸.. 하는 후회가 든다. 어쩌면 내 탓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 다 쓸 데 없다.

불행에 이유를 찾다보면, 언제나 불행이 확대 재생산 되는 법이니, 엄마가 왜 몹쓸 병에 걸렸는지는 앞으로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다시 느끼는 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건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부질 없는 그 돈 때문에 엄마가 평생 마음을 졸였다니... 정말 가슴 아프다.

P.S 사실 상 엄마를 살린 건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다. 엄마가 바깥 활동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면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정말 고마운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