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의 신비

일상 2021. 2. 5. 15:45

  내 키는 158cm. 결혼 전까진 쭉 48kg 정도를 유지하다가 결혼하고 시험관 하면서 55kg까지 살이 쪘다. 임신 초기에는 살이 52kg였고, 현재 임신 36주 1일의 내 몸무게는 62kg 정도 된다.

  쌍둥이치고는 살이 별로 안 쪘고 배도 겁먹었던 것보다는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뱃속에 각각 2.5kg, 2.4kg의 딸아이 둘이 있다. 단태아는 커봤자 4kg정도인데 나는 그보다도 1kg가량 무거운 무게를 뱃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난 키도 작고 몸 둘레도 엄청 작은 편이라 과연 이 허술한 몸에서 쌍둥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잘 버틸까? 언제나 의문스럽고 걱정스러웠는데 신기하게도 내 자궁과 배는 무한정 잘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튼살도 없다.

  우리 엄마는 결국 작년 10월 25일에 돌아가셨고, 그때는 임신 21주 지난 시점이었다. 엄마는 참 좋은 계절에 하늘나라에 갔다. 장례치루는 내내 날씨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엄마가 누워계실 때 조차도 난 만삭 때 돌아가시거나, 산후조리원 있을 때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지금 당장 돌아가셨으면 좋겠단 마음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난 내 걱정만 한 것이다. 자식은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의식이 없어지고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되었을 때부턴 차라리 빨리 돌아가셨으면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의식이 없는 와중에 눈물을 몇 방울 흘리셨는데 무슨 생각하면서 우신 걸까. 나중에 내가 죽어 엄마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한편으론 엄마가 돌아가신 것과 동시에 내 기억은 다 잊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나를 기억하시거나 지켜보고 계시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엄만 편치 않고 걱정만 하실 게 뻔하기에.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하나님이 너무 밉다. 코로나여서 교회도 안가고, 동영상 예배도 안 드린다.

  엄마랑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외삼촌이 임종실에서 엄청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를 땐 화가 났다. 아마도 그게 외삼촌 나름의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친척들은 엄마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죽기 전에도 편안하신 거라고 위안했지만 죽기 전에 표정이 편안하신 거 하나도 안 감사했다. 난 우리 엄마가 살아계신 것에 감사하고 싶었다.

  장례식장에 온 친척과 엄마 지인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임신 중이니 아기 생각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알겠다고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다들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임산부이기 이전에 35년 넘게 [나]로 살아왔는데 세상에서 가장 날 사랑해줬던 사람이 죽었는데도 내 감정보다도 아기들이 우선이 돼야 한단 말인가.

  오직 내 남편 하나만 그런 말을 안했다. 내가 미친 듯 울어도 남편은 뱃속 애기들 생각해서 울지 말란 말은 안 했다. 그래서 난 남편을 더욱더 사랑하게 됐다.

  임신 16주 쯤에 성별 들으러 가기 전에 뭔 자신감인지 남녀 쌍둥이일 것이라 확신했는데 둘 다 딸이란 얘기 듣고 한 달을 우울했다. 임신에 집착한 이유 중 가장 큰 게 남편 똑 닮은 아들을 낳고 싶어서였는데... 아들이 없다는 생각에 너무 아쉬웠다. 사실 지금도 문득문득 둘 중 하나는 남편이랑 똑같이 생긴 아들이었음 좋았을 것이다 싶어서 우울하다. 하지만 딸들이기 때문에 내가 임신한 중에 매일같이 울었던 것도, 장례 중 무리한 것도 다 이해해주리라 생각한다.

  아빠는 나한테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놓고선 또 언제 그랬냐는듯 사과 한마디 없이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다. 엄마가 돌아가셔도 아빠가 그다지 안쓰럽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아빠를 내 맘에서 떠나보낸 것 같다. 한편으론 아빠가 엄마를 괴롭힌 벌로 혼자 외롭게 사는 형벌을 받았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12월 중순부터 휴직했고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남편을 기다린다. 시간도 엄청 많은데 의외로 책도 별로 안 읽고 짧게라도 일기를 쓰던 버릇을 놓아버리니 너무 무식해지는 것 같아 이렇게 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일기를 쓴다.


엄마의 끝1

투병 2021. 2. 5. 14:46

1. 주치의 전화

  6월 중순 피검사로 임신 수치를 확인한 다음날 우리 엄마 주치의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의 뇌척수에서 암세포가 검출되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뇌척수에서 암세포 검출 확인한 그 순간 엄마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었는데, 엄마의 주치의가 40대로 비교적 젊어서 그런지... 차마 우리 가족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을 못 했던 것 같다. 보통은 뇌척수에서 암세포 검출되면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로 보내진다. 왜냐면 그 어떤 치료도 뇌척수 전이에는 무효하기 때문에.

  뇌척수는 우리 몸에서 혈액이 흐르지 않는 곳으로 그만큼 특별하고 청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곳이다. 혈액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혈관으로 주입하는 항암제의 영향이 미치지 않으며 암세포도 보통은 감히 척수까지는 침범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엄마의 암세포는 지독했고, 그 암세포들을 죽이느라 4년동안 쉼 없이 혈액으로 항암제를 때려 넣었더니 암세포들이 항암제 영향을 받지 않는 뇌척수까지 침범했다.

  현재 나온 항암제 중, 뇌척수 전이에 효과있는 항암제는 폐암 항암제인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라는 약이 거의 유일한데, 난소암은 비급여로도 처방이 안된다. 만약 타그리소를 비급여로 처방받을 수 있다고 한들 한 달 약값이 1200만 원 정도니. 우리 집 사정으로는 몇 개월 못 드셨을 것이다.

  근데 그 대단한 타그리소 조차도 언젠간 내성이 생기고 대부분은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치료제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니까, 뇌척수 전이 판정을 받으면 암과의 싸움에서 최종 패배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주치의 변경

  4년간 엄마를 치료한 주치의는 다정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착한 의사였다. 엄마가 실비보험 갖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서, 통원으로 치료해도 될 치료도 우리가 요청하면 입원으로 치료해 줬다. 보통 의사들은 체면 때문인지 노골적으로 실비 있냐고 묻지도 않을뿐더러, 환자가 사정해도 입원 안 시켜준다. 유명 병원의 입원 병상은 항상 부족하므로. (보통 실비 보험의 경우, 통원 보장한도는 약 25만원, 입원 보장한도는 5천만 원이다. 환자가 만약 5백짜리 약 처방이나 치료가 필요할 경우, 통원으로 치료받을 경우, 환자는 나중에 보험사에서 최대 25만 원을 돌려받는다. 하지만 입원할 경우 치료비의 90%인 450만 원을 보험사에서 돌려받을 수 있다. 때문에 비싼 치료를 받는 환자일수록 입원으로 치료받는 게 훨씬 유리하다.)

  주치의는 뇌척수 확진 후 우리 엄마를 포기했지만 예의상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호스피스 가라는 말 대신 다른 의사에게 엄마를 인계했다. 계속 [연명치료거부동의서] 쓰라고 하시긴 했지만.. 이제와서는 이해 한다. 암만 치료하는 병원인데 엄마 같은 환자를 얼마나 많이 봤을까. 희망이 없단 거 다 아셨겠지.

  그 사이 엄마의 뇌척수에 퍼진 암은 점점 커져서 뇌압은 점점 상승했고, 엄마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쉼없이 이어지는 구토와 시신경 세포가 눌리면서 나타나는 복시 현상 그리고 최악의 두통으로 엄마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고통이 극심하여 뇌의 신경을 차단하는 시술도 해봤지만 딱 하루 효과가 있었다. 

  그 딱 하루 효과 있던 날, 엄마는 "우리 딸 예쁘네..." 라고 말하며 오랫동안 조용히 날 응시했다.

  나중에 그 모습이 계속 생각나서 화장터에서 엄마의 몸이 불타는 동안 미친 듯 울었다.

  내가 뭐라고 엄마는 그렇게 날 좋아했을까. 참 지나치게 나를 좋아했다. 부족하고 잘난 것도 없는 나에게 엄마는 언제나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난 엄마처럼 애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